[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위대한 밥상

  • 입력 2023.06.25 18:00
  • 수정 2023.06.26 06:27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모내기가 끝나자마자 미뤄뒀던 밭일에 비로소 눈을 돌립니다. 어느새 키가 훌쩍 자란 고추는 여차하면 가지가 쳐질 판입니다. 얼른 줄을 쳐야 고추가 주렁주렁 달릴 터이고, 소독소독 자란 참깨도 솎아줘야 합니다. 밭고랑 사이에 풀은 또 어찌나 빨리 자라던지, 자꾸 손을 잡습니다. 바쁜 일이 끝났다 해도 자잘한 일들이 넘치는 농촌 늦유월의 복판을 삽니다.

젊은 시절에는 농사일이 힘들어서 가급적 일을 적게 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많더니, 희한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농사일이 더 재미있고 애착이 가기도 합니다. 그것이 농민으로 살아온 세월의 증거라고나 할까요? 화가나 배우가 평생의 제 일을 사랑하듯, 농민도 오십 줄을 넘기면 일의 고달픔은 있어도 일맛을 제대로 느끼게 되나 봅니다. 어른들께서 눈만 뜨면 괭이 하나 챙겨서 들로 나가는 그 심정을 이제야 알 것도 같습니다. 하루하루 커가는 곡식의 양태에 온통 마음이 빼앗기니 달리 힐링이랄 것도 없습니다. 비싼 돈 들여 먼데 여행가는 재미보다 들판의 곡식들 돌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것을 나이가 먹어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은 제 시기에 작물을 제대로 돌봐줘야 하는 일이기에, 때를 안 넘기려고 아득바득 이를 악물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름은 한낮에는 너무 뜨겁고 더워서 일을 하기가 어려우니 햇살과 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과 해가 기우는 오후에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밥입니다. 아무리 찬이 없는 밥상이라 해도 준비를 하려면 족히 한 시간은 더 걸립니다. 나이가 들수록 침이 줄어서 밥을 넘기기 어려우니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 하고, 그래도 서운하니 나물이나 조림은 차려야 최소한의 영양이 보장되는 밥상 구성이 이뤄지는데, 이를 준비하는 시간이 만만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혼자라면야 대충 때우듯 한 끼를 먹지만, 가족이 있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찬을 한 가지라도 더 해서 내놓게 되니까요. 덕분에 같이 잘 먹게 되어서 좋지만,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보니 문제인 것이지요.

새벽일과 식사준비, 이 두 가지 일 사이에서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또는 꼭 해야하는 농사일을 하려면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데, 식구들은 제때에 밥이 차려지기만을 기다리니, 밥을 해야 합니다. 또는 밥을 해놓고 있는데, 정작 식구들은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물꼬를 보느라 늦게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버려지는 시간이 아까워 발을 구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밥 준비 대신 할랑하게 논밭을 돌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것이지요. 나이 좀 들어서 혼자 사는 자유가 부럽다고 하는 얘기가 그래서 나왔겠지요. 세 끼를 집밥 먹는 삼식이 남편이 3박4일로 여행을 떠나고 나니, 혼자 새벽일 하는 재미가 너무 좋더라는 이웃 마을 분의 얘기도 생각납니다.

새삼스레 밥하는 데 대한 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사노동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을 농사지어온 전문가로서 자기 일을 하고 싶어도 가족의 요구를 수용하는, 또는 수용해야만 하는 삶을 사는 데 대한 헤아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절로 뚝딱 차려지는 밥상은 없습니다. 농사 때를 맞추려면, 폼나게 농사를 지으려면 거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한 단계 조정해서 기꺼이 누군가를 위한 밥상을 차려냅니다. 타자의 삶과 함 께하기 위한 섬세한 배려가 오랜 세월 몸에 익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차려지는 여름 밥상은 위대한 밥상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