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들과 딸② ‘한글학교’에 사연도 많더라

  • 입력 2023.06.18 18:00
  • 수정 2023.06.19 06:3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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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2002년 5월 어느 날, 순창공공도서관의 여성한글학교에 40대 중반의 주부가 찾아왔다. 한글학교의 김만수 교장이 그를 맞는다. 여인이 대뜸 묻는다.

-여그가 글자 모르는 사람들한테 한글 갈쳐주는 학교지라우?

다른 데에서는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요모조모 별별 궁리를 다 하다가도, 여기 오면 누구든 일단 그런 부끄러움이며 조바심 따위 훌훌 벗어던진다. 그러라고 만든 학교다. 그런데 사는 곳을 물어본 김 교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여인에게 묻는다.

-유등면 무수리라면, 강을 건너서도 한참 멀리 가야 나오는 동넨데…어떻게 다니시게요?

-적성까지만 나오면, 여그까장 오는 직행버스가 있응께 고놈 타고 오면 됩니다.

-오시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수업이 밤늦게 끝나는데 집에는 어떻게 가시려고요?

-앗다 선상님, 그런 대비도 안 세워놓고 무턱대고 왔겄습니까. 여그서 적성까장은 버스를 타고 가고, 거그서부텀은 쬐끄만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됭께 걱정 마시랑게요.

이 40대 여학생의 등하교 과정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 자택에서 적성면 소재지의 버스 정류장까지는 조그만 오토바이를 타고 온다, 타고 온 오토바이를 정류장 근처 어딘가에 맡겨두고 직행버스를 타면 버스가 섬진강을 건너서 한글학교가 있는 순창읍까지 데려다준다, 한글학교가 파하면 순창읍에서 섬진강 너머의 적성면 소재지까지는 버스로 갔다가, 맡겨둔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이 여자분의 사례만으로도 한글학교를 찾아온 사람들의 배움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만하지요? 제가 삼십몇 년을 교직에 있었지만 수업에 대한 열의는 이분들이 최곱니다.”

40대 중반이면 1950년대 말에 태어났다. 그가 국민학교에 진학할 나이였던 60년대 중반은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으로 정착되었던 시기다. 하지만 농어촌 벽지에서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학교 문턱에 발을 들이지 못하거나, 한글을 제대로 깨치기도 전에 중퇴한 아이들이 적잖았다.

또 한 주부는 자신이 운전하는 트럭에다 마을 사람 예닐곱 명을 태우고서 통학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글을 잘 몰라 더듬거리는 그 주부가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림면 운남리라는 산간마을에 사는 분인데, 여기까지 거리가 12킬로나 돼요. 높은 재를 넘어야 하니까 눈이 많이 쌓이는 날은 못 오지만 그 외엔 악착같이 등교를 합니다.”

김 교장은 호기심이 동해서, 한글을 더듬더듬 읽는 실력으로 운전면허증을 어떻게 땄느냐고 조심스레 물어봤다는데…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자세히는 묻지 말드라고요. 그때는 뭐, 그렇게 저렇게 다 따는 수가 있었응께. 중한 것은, 내가 여적지 사고를 한 번도 안 냈다는, 그거이 중한 것이제. 안 그라요, 선상님?

이 여인은, 혹시라도 운전면허를 취소당해서 필기시험을 다시 치르는 ‘불상사’가 닥칠까봐, 그것이 매우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조심 운전, 모범 운전, 준법 운전을 했을 수밖에.

그렇다면 기껏해야 한글과 간단한 산수를 가르치는 특별날 것 없는 이 학교에, 40대부터 8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농촌 여성들이 그처럼 악착같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짜다가 농협이나 우체국에 가면, 말로만 해서는 일 처리가 안 돼요. 주소를 써라 뭣을 써라…. ‘사실은 내가 한글도 숫자도 잘 몰르요’ 이렇게 말하기가 얼마나 챙피한지 아요?”

이 할머니 학생은, 까막눈의 설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며 눈물을 글썽인다.그렇다면 이들은 왜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쉽다는 한글을 깨치는, 기초적인 교육의 혜택으로부터도 소외됐던 것일까?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세상살이가 궁핍하다 보니 교육받을 기회를 놓쳤을 것이라고 간단하게 넘길 일은 아니다. 똑같은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인데도 남자들의 경우 문맹자가 매우 드문 편이다. 바꿔 말해서 그들은 비뚤어진 남아선호 풍조의 희생자였다는 얘기가 된다. 나이든 여성들이 수십리 길을 달려와서 ‘가갸거겨’를 배우는 순창여성한글학교는, 그 자체로 홀대받아온 여성들의 수난의 역사가 아프게 굼틀거리는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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