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배우고 도전하는 여성이 자유롭다

  • 입력 2023.06.18 18:00
  • 수정 2023.06.21 11:20
  • 기자명 신수미(강원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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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미(강원 원주)
신수미(강원 원주)

비가 몇 차례 쏟아지고 나니, 풀이 기세등등하게 올라오기 시작한다. 풀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제초제를 비롯한 농약을 쓰지 않는다. 작은 풀일 때는 괭이로 긁고, 조금 더 크면 호미로 뽑고, 풀이 무릎 가까이 크기 시작했다 싶으면 예초기를 사용한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적은 규모라서 가능한 선택이다.

그래서 농사짓기 시작한 해에 선물 받아 쓰기 시작한 충전식 전기예초기는 내가 좋아하는 영농도구이다. 작동이 쉽고, 가볍고, 무섭지 않다. 게다가 충전한 배터리가 다 되면 작업을 중단할 핑계도 만들어 쉴 수 있게 해주는, 눈치가 있는 물건이다. 대신 줄기가 두꺼운 풀은 쇠 날을 써야 하고, 배터리도 금방 닳아 밭둑이나 고랑을 깎거나 콩순을 날리는 정도의 작업에 쓰는 것이 적당하다. 한마디로 아주 초보적이고 간단한 기계라는 말이다.

하지만 처음 예초기를 들고 밭둑을 깎는 나를 바라보는 동네 할머니들의 눈빛은 달랐다. 기계로 풀 깎는 여성을 처음 보신 것 같았다. 말씀이 별로 없는 옆 밭 아주머니도 내가 작업하는 것을 한참을 쳐다보다 들어가셨고, 일 할 때마다 말을 걸어서 나를 난감하게 만들던 할머니는 ‘아이고 예초기도 써요?’라고 신기한 듯이 말을 건네셨다. 할머니들 눈에는 기계의 차이는 잘 안 보이고 예초기를 가지고 풀을 깎는 여자만 보였던 것 같다.

농작업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 남성들의 몫이다. 그래서 땅을 갈아 고랑을 타고 비닐을 씌우는 작업을 할 때는 아저씨들이 주로 밭에 나와 계신다. 하지만 작물을 심고 나서 관리하는, 사람의 손이 필요한 시기부터는 거의 안 계신다. 작년에 농사짓던 밭의 바로 옆집이 그랬다. 아주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항상 밭에 나와 계셨고, 밭이 정말 정갈하고 깔끔했다. 동네에서 농사 잘 되기로 유명했다. 반면 아저씨는 기계로 하는 작업단계가 끝나고 나면 밭에서는 만나기 어려웠고, 주로 자전거를 타고 동네 마실을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농업에 기계가 도입된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고, 밭농사는 아직도 기계화 되지 않는 작업이 많다. 현실적으로 농기계는 여성이 다루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농작업에서 성역할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도입되는 기술과 기계를 접하고 배울 기회에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농촌사회를 새삼 보게 된다는 얘기다. 배우지 못해 가장 소외된 경우는 아마 이동수단이 아닐까 싶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농촌에서는 이동수단이 필수다. 버스를 기다리다 지치고, 온 동네를 순회하는 완행버스를 타다보면 자연스럽게 차를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농촌 할머니들은 운전을 못하시고 차도 없다. 나이 때문에 운전을 못하시는 게 아니라 아예 운전을 배우지 못했고, 차는 아저씨 것이지 아주머니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몇 번 일마치고 시내로 나오는 길에 함께 갈 수 있는지 물으시는 어머님들을 태워드리는 경우가 있었다. 차가 없는 어머님들은 아마 읍내라도 나가려고 하면 하루에 몇 대 없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남편이 시간을 내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동네라도 걸어가기 어려운 거리라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참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누르고 밭이나 부엌에 다시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강원도로 오면서 처음으로 차를 살 때 누군가 차를 몰기 시작하면 생각과 활동반경이 엄청나게 넓어질 것이라고 했는데, 진짜 그랬다. 맘만 먹으면 가서 볼 수 있었고, 배울 수 있었고,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농사를 시작한 뒤로 새로운 환경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도 이건 남자가 하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도움받을 생각부터 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는 나를 반성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고 도전하는 것은 나를 성장하게 하고 자유롭게 해준다. 청년이 살아갈 농촌에서는 더 많은 여성에게 더 다양한 배움과 도전의 기회가 제공되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여성 이장과 더 많은 여성 대표자와 더 많은 여성농민이 농촌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면 좋겠다. 여성들이 자유로워지면 우리 농촌의 삶은 더 활기차고 다양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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