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들과 딸① ‘가갸거겨…’를 배우는 할머니 학생들

  • 입력 2023.06.11 18:00
  • 수정 2023.06.12 08:0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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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2002년 초여름의 어느 날 저녁,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공공도서관 3층에 마련된 널찍한 방에서는, 세미나도 아니고 토론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 학교의 수업하고도 다른 매우 진지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통로를 비집고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책상에는 80여 명의 나이든 여성들이 앉아서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부를 테니까 받아서 적으세요. 가-마-니. 받침이 없는 쉬운 글자니까 다들 쓸 수 있을 거예요. 나락 담고 보리쌀 담는 가마니 모르는 분은 없지요. 다 썼어요?”

나이든 ‘여학생’들에게 받아쓰기 문제를 불러주는 선생님 역시 귀밑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다.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고, 그 가마니에 남박(나무 바가지)으로 멍석의 곡식을 그러담는 일이라면야 선생님보다 훨씬 능숙하게 잘할 수 있을 터이나, 그 세 글자를 공책에 적는 일은 영 서툴다. 선생님이 다음 문제를 부른다.

“역시 받침이 없는 쉬운 낱말입니다. 아-주-머-니. 이 글자들은 전에 배웠지요? ‘주’자가 어려워요? 지읒(ㅈ)에다가 우(ㅜ)…아이고, 이 학생은 아주모니라고 썼네. 모가 아니고 머….”

받침이 없는 쉬운 낱말이라며 선생님이 불러주는 그 ‘아, 주, 머, 니’라는 네 글자를 종이에 옮겨 그리기가 학생들에게는 만만한 과제가 아닌 성싶다. 길쌈을 하고 바느질을 하고 시루떡을 앉히는 일이라면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는데, 평생 해보지 않던 글자를 만들어 내는 일이 그렇게 고된 품이 드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노라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린다. 한글을 모르는 나이 든 여성들에게 글눈을 틔워주자고 마련한 ‘순창여성한글학교’의 수업 풍경이다.

3년 전인 1999년의 어느 주말 오후, 순창읍의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한 할머니가, 이고 있던 보퉁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드나드는 버스들을 번갈아 곁눈질하며 중얼거린다.

-해는 기울어 가는디, 얼릉 집에 가야 쓸 것인디… 어뜬 놈이 어디 가는 뻐슨지 알어야 타든지 말든지 허제. 여보시오, 운전수 양반, 이거 혹시 구림면 월정리 가는 차 아니오?

-아, 버스 앞에 써붙여 논 것 보면 몰르요! 어디 가는 찬지 보고 타면 될 것 아니여!

운전수한테 면박을 당하고서 낭패스런 표정으로 걸음을 자박거리는 할머니 앞에, 신사 한 사람이 다가선다.

-할머니, 어디 가시려고 그러는데요?

-아, 쩌그…구림면 월정리 갈라고 하는디, 눈이 침침해서 글자가 통 보여야 말이제.

-할머니, 이 차가 아니고 옆에 있는 저 차가 월정리 갑니다. 제가 보따리 들어 드릴게요. 저도 저 차 타고 가다 중간에 내립니다.

이 신사는 당시 순창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던 교사였다. 그는 버스에 타자마자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버스 앞에 붙여놓은 한글 표지판 그거 읽을 줄 모르시지요? 저희 어머니도 글자를 몰라서 밖에만 나오면 고생을 하시는데….

잠자코 말이 없던 할머니가, 상대가 ‘선상님’이라니까 털어놓겠다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내가 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 했겄소. 시상을 잘 못 만난 것이 죄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죄제. 그동안 까막눈으로 살어온 설움을 다 털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는디….

그 교사의 제안으로 순창고등학교에 ‘여성한글학교’가 개설되었고, 나이든 여성들의 글눈을 틔워 주기 위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운동에 자치단체 당국이 적극 호응해서 군립도서관으로 그 학교를 옮겨 오게 되었다. 이것이 순창여성한글학교가 탄생하게 된 내력이다. 내가 찾아갔을 당시에는, 초등학교에서 교장과 교감으로 봉직하다 정년 퇴임한 두 명의 할아버지 선생님들이 담임을 맡아서 함께 봉사를 하고 있었다.수업 참관이 끝난 뒤, 나는 몰려드는 할머니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문맹자로 살아온 갑갑했던 사연뿐만 아니라, 아들과 차별받으며 ‘딸로 살아온 설움’을 다투어 털어놓겠다고 자원하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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