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친절한 남자

  • 입력 2023.06.11 18:00
  • 수정 2023.06.21 11:2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성숙(전남 진도)

기상청에 대한 신뢰도가 자꾸 떨어진다. 장마철도 아닌데 일기예보가 실시간으로 달라진다. 참깨를 심으려고 일꾼들과 비닐을 씌우면서 일기예보를 자주 확인했다. 이틀 후에 비 올 확률은 60%인데 날씨는 흐리다고 발표했다. 레이더 영상에 파랗거나 빨간색 색으로 잡히면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인데 60%의 확률이란다. 비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감안하라는 것인지 불안하기만 했다. 일꾼 중에 중국 연길에서 온 사람이 있어 일기예보를 좀 봐달라고 했더니, 중국 기상청 일기예보는 이틀 후에 비 올 확률이 90%였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우리나라 기상청 일기예보는 비 올 확률이 90%라고 했다.

하루는 한국인 남성이 봉고차 운전을 해 베트남 국적의 일꾼들과 함께 참깨를 심으러 왔다. 한국인 남성의 부인은 같이 일하러 온 베트남 여성이었다. 부부는 나란히 앉아서 참깨를 심어갔는데 남편의 고랑을 손 빠른 부인이 심어주면서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갔다. 부부는 일하면서 조곤조곤 계속 말을 했다. 일꾼들 앞에서 모종을 뽑아주다 보면 그들 부부가 하는 말들이 귀에 들어왔다. 부인한테 전화가 오면 통화 내용을 남편에게 얘기하고 또 남편한테 전화가 오면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내용을 부인한테 알렸다. 참 다정한 부부로 보였다.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부인한테 알렸다. 어머니가 캐 놓은 마늘을 집안으로 들여야 하니 집에 오라고 했다고. 그 말을 들은 부인은, 지금은 일하고 있으니 나중에 집에 가겠다고 하란다. 남자는 그러겠다고 했다.

아내한테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남편을 오랜만에 구경했다. 그 남자는 심지어 아내한테 공손하기까지 한 것 같았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 남자는 아내한테 먼저 물을 종이컵에 따라 주고 다 먹은 도시락 정리까지 하면서 아내의 수고를 최대한 덜어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내 주변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장면이라 낯설고 이상했다. 요즘 도시에서 젊은 남성들은 퇴근하면 집에 들어와 육아와 집안일을 많이 하는 추세라고 해도 시늉이나 하겠지 싶었는데 그 남자의 태도를 보니 가능한 일이겠구나 싶었다.

다음날은 일꾼이 더 필요해서 봉고차를 운전하고 온 남자한테 일꾼을 더 데리고 올 수 있냐고 물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남자가 결정해서 내게 알려줄 줄 알았는데 와이프(그 남자의 표현)한테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순간, 이 상황이 뭐지? 싶었다. 오후에도 비슷한 일이 생겼다. 일감을 마치려면 1시간 더 일해야 할 것 같아서 해 줄 수 있겠냐고 남성한테 물었더니 또 와이프한테 물어봐야 한단다. 그래서 부인인 베트남 여성한테 가서 1시간 더 일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바로 그러겠다고 확답을 해줬다.

세상의 인심이 여성에게는 야박하고 편협해서 부당하게 느꼈고 많이 불편하다. 그런데 그런 세상의 인식에 나도 한몫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 가정사의 결정권은 남성한테 있으리라 지레짐작하여 남성한테 물었는데 일정의 판단과 결정을 여성이 하는 것에 놀라서 당황했다.

농촌의 가정에서는 근력이 곧 권력이라 남편의 의도나 의지에 따라 농사 일정이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트랙터를 비롯한 농기계가 근력을 대신하는데 그 운용 또한 남성의 영역이 되었다.

배려 받는 아내가 되려면 농업 외 소득으로 경제력을 갖든 농기계를 다루는 요령을 터득하든 해야 할 것 같은데 트랙터는 너무 커서 운전해 볼 엄두가 나지 않고 지게차는 자칫 실수라도 하면 대형 사고가 날 것 같아서 겁나고. 그러니 수시로 큰소리치면서 내 속을 긁어놓는 남편의 권력 남용을 계속 견뎌야 하는지….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