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들의 ‘미치도록 눈부시던’ 삶, 우리 앞길 비추네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출간

  • 입력 2023.06.09 11:55
  • 수정 2023.06.11 21:54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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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 6일 서울 안국동 상생상회 지하 1층 공유공간에서 열린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 출판기념회 행사에 오분임 전 전남여성농민회장(왼쪽 네 번째 발언하는 사람) 등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7명이 참석했다.
지난 6일 서울 안국동 상생상회 지하 1층 공유공간에서 열린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 출판기념회 행사에 오분임 전 전남여성농민회장(왼쪽 네 번째 발언하는 사람) 등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7명이 참석했다.

여성농민이 ‘아무개씨 아내’, ‘아무개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당당히 내세우는 주체로 우뚝 서게 만드는 데 앞장섰던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들. 그중 9인의 ‘미치도록 눈부시던’ 생애를 담은 구술기가 나왔다.

여성농민운동 후원운동조직 ‘땅의사람들’이 기획한 여성농민 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도서출판 말)이 지난 3일 출간됐다. <미치도록 눈부시던>은 4명의 기록자(강희진·권미영·이태옥·이해승)가 2020~2022년 오분임 전 전남여성농민회장, 성옥선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부회장, 임봉재 전 가톨릭농민회장(가농), 장순자 초대 가농 전국부녀분과위원장, 이종옥 전 전남여성농민회 부회장, 임순분 전 전여농 회장, 이정옥 초대 전여농 회장, 고송자 전 전여농 회장, 박남식 전 전여농 부회장 등 9인의 여성농민 운동가들을 만나, 그들이 구술한 생애사를 기록한 결과물이다.

지난 6일, 서울 안국동 상생상회 지하 1층 공유공간에선 땅의사람들 주관, 내일의식탁 후원으로 <미치도록 눈부시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기념회장은 여성농민들의 구술기 출판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여성농민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농민·시민들로 가득 차 활기가 넘쳤다.

출판기념회 1부는 책의 주인공인 여성농민들의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참석한 여성농민 운동가들은 ‘여성’이자 ‘농민’으로서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 싸웠던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했다. 주인공 9인 중 임봉재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고송자 회장은 부득이한 개인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눈부시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오분임 회장(전남 해남)은 일제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한을 풀고자 시작한 강제징용자유족회 활동 과정에서 정광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만나며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수세 폐지투쟁 등 농민들의 투쟁 현장을 빠짐없이 누볐던 오 회장은 “마이크만 쥐면 기가 났제”라며 지금까지 당당하게 여성농민 운동가로 살아온 나날을 회고했다. “꽃만 보고 살 수 있나? 농촌은 뿌리요, 도시는 꽃이다”라는 ‘농촌 뿌리론’은 오 회장 평생의 지론이다.

‘호되게 똑똑한 여자’ 성옥선 부회장(충남 부여)은 “‘가방끈 짧은 농민’의 고통을 절감하며 살아왔다. 농협을 가도 가방끈 짧다고 직원들에게 무시당해온 게 농민들의 한”이었다며, 그러한 무시에 맞서기 위해 농민운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과거 농협 조합장을 만나러 갈 때 “큰 숨을 들이쉬어야 했던” 성 부회장은 동료 여성농민들과 함께 당당하게 조합장실로 직진하는 운동가로 거듭났다.

장순자 위원장은 1985년 8월 전북 부안에서 열린 ‘소값 피해보상 궐기대회’ 당시 공권력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연행돼 5일간 부안경찰서에 구류당했을 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경찰서장이 나 보고 (내가 감금된) 방에 걸린 <주자십훈>을 낭독하라더라. 내용 중에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원문은 ‘이성을 가까이 하지 말라’인데 당시 경찰서에 왜곡된 내용이 걸린 듯함). 병든 후에 후회한다’란 내용이 있길래 그걸 ‘남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 병든 후에 후회한다’고 바꿔 읊었다. 여기저기서 깔깔 웃었다. 나중에 보니 그 <주자십훈>을 떼버렸더라. 그렇게 굴하지 않고 맞섰던 것이 눈부신 기억으로 남아있다.”

경북 성주 소성리의 임순분 회장은 “나이 스물에 결혼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마누라로 불리며 살다가 어느 순간 내 이름이 사라졌다. ‘내 이름은 임순분’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임 회장은 1979년부터 소성리의 또래 여성 7명과 함께 ‘팔부녀회’ 활동을 전개하며 여성농민의 권리를 찾기 위해 앞장섰다. 그 과정에서 임 회장은 다시 자신의 이름 ‘임순분’을 되찾았고, 지금도 미군이 배치한 종말단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를 소성리에서 빼내고 평화를 심기 위해 싸우는 ‘평화운동가 임순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안국동 상생상회 지하 1층 공유공간에서 열린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 출판기념회 행사 2부에서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들과 청년농민 간의 토크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 앉은 사람 기준 왼쪽부터 강원도 화천 청년농민 송주희씨, 이정옥 초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경기도 남양주 청년농민 김한솔씨, 장순자 초대 가톨릭농민회 전국부녀분과위원장.
지난 6일 서울 안국동 상생상회 지하 1층 공유공간에서 열린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 출판기념회 행사 2부에서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들과 청년농민 간의 토크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 앉은 사람 기준 왼쪽부터 강원도 화천 청년농민 송주희씨, 이정옥 초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경기도 남양주 청년농민 김한솔씨, 장순자 초대 가톨릭농민회 전국부녀분과위원장.

출판기념회 2부에선 이정옥 회장과 장순자 위원장이 청년 여성농민 2명(강원도 화천 송주희씨, 경기도 남양주시 김한솔씨)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위 ‘세대 구분’은 여성농민들 앞에서 의미가 없었다. 가족의 반대와 마을 주민들의 편견을 극복하고 ‘남편 될 사람을 이곳 화천에 데리고 와서 농사짓겠다’는 결심을 실현한 송주희씨, 자신이 있는 면(面)의 유일한 청년 여성농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김한솔씨의 삶을 선배 여성농민들은 진심으로 응원했다. 청년 여성농민들도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면서도 농민으로서 굳건한 생활력을 발휘한(청년 여성농민들은 장순자 위원장이 소 쟁기질 작업을 해왔다는 말에 놀랐다) 선배 여성농민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투쟁 속에서, 서로의 끈끈한 동지애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농민을 무시하던 자들을 혼쭐내고, 불합리한 농촌 현실을 바꿔온 여성농민들. 미치도록 눈부셨고 지금도 눈부신 그들의 삶. 앞으로도 영원토록 농민의 앞길을, 우리 사는 세상의 앞길을 비추리라.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 도서출판 말 제공
1세대 여성농민 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 도서출판 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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