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저수지⑥ 한겨울, 저수지가 숨을 쉬는 법

  • 입력 2023.05.21 18:00
  • 수정 2023.05.23 21:3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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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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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왔다. 아이들은 등하굣길에 제법 얼음이 얼기 시작한 저수지의 가장자리 쪽에다, 제 머리통만 한 돌을 낑낑대며 들어 올렸다가 힘껏 던져본다. 얼음이 깨지고 첨벙, 물보라가 튄다. 아직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저수지의 겨울은, 수면 전체가 꽁꽁 얼었을 때라야 비로소 시작이다.

저수지가 얼면 그곳은 또 한 번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기껏 허리춤 깊이의 물가에서 첨벙거리다 나오는 여름철의 놀이와는 견줄 바가 아니다. 아이들은 몇 밤이나 자면 그곳이 저희의 빙판 놀이터가 될 것인지를 나름으로 어림해본다. 그 전에 준비할 것이 있다. 썰매를 만드는 일이다.

1936년생인 최육근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썰매 바닥에 붙일 철사 토막을 구하기 위해서 된 고생을 했노라고 회고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물자가 워낙 귀하기도 했고요, 더구나 어린 애들이 썰매 바닥에 붙일 굵은 철사를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 시절 저수지 아래쪽의 논들은 두렁 바깥쪽에다 방천(防川])을 했거든요. 홍수가 나면 수로의 급류가 넘쳐서 논 안으로 흙탕물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돌로 쌓아놓은 둑을 방천이라고 하는데, 굵은 철사로 돌무더기를 그물처럼 얽어매서 쌓아놨단 말이에요. 동무들하고 소 꼴 베러 올라갔다가 철사 고놈을 끊어내겠다고 낫등으로 때리고 돌멩이로 쪼아서 힘들게 철사 토막을 끊어내요. 썰매 밑바닥에 붙이겠다고…. 물론 그러다가 논 주인한테 걸리면 나 죽었소, 해야지요, 허허허.”

국민학교 시절 교실 유리창 청소를 하다 보면 창틀의 레일이 여기저기 끊겨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게 다 썰매 밑바닥에 부착하기 위해서 고학년 사내 녀석들이 저지른 소행이다.

드디어 저수지가 꽁꽁 얼었다. 아이들이 썰매를 옆구리에 끼고 저수지로 향한다. 저수지가 두터이 얼면 부피가 늘어나기 때문에 여기저기 쩍쩍 얼음장 갈라지는 소리가 마을에까지 들린다. 그런 소리가 들리고 나면, 부모들은 아이들이 저수지에 가는 것을 크게 말리지는 않았다. 그 소리는 바로,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고 저수지가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엄니, 나 저수지에 가서 썰매 타고 올 것이구먼유.

소년 최육근이 득의만면한 얼굴을 하고서 썰매를 옆구리에 끼고 나선다.

-이 녀석, 방학 숙제는 하나도 안 했으면서. 그런데 썰매 타러 혼자 가겄다는 것이여?

-아니. 거그 가면 동무들 많이 있어.

-썰매 탈 때 얼음판 숨구멍 조심해야 쓴다이. 자칫하면 큰일 나.

부모들은 아이들을 저수지로 내보내면서 ‘숨구멍’을 조심해야 한다고 특별히 당부한다. 윤용병 이장도, 저수지가 얼면 군데군데 숨구멍이라는 것이 생긴다고 거들고 나선다.

-얘들아, 우리 셋이 썰매 타고 저쪽 건너편에 갔다 오기 시합하자.

-참말로? 뭐 내기할까? 꼴등이 1등한테 군고구마 하나 갖다 주기.

-좋아. 내가 시작 신호를 하면 출발하는 거야. 시이작!

그런데 얼음을 지치며 한참을 나아가다 뒤를 돌아보니, 분명히 셋이서 출발을 했는데 한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두 아이가 토끼 눈을 하고서 서로를 쳐다본 채 얼어붙는다. 그때 없어졌던 아이가 저만치 뒤쪽에서 물 밖으로 고개를 쳐들고 허우적거린다.“썰매를 타고 한참 가다가 돌아보니까 한 놈이 감쪽같이 없어진 거요. 말하자면 숨구멍에 빠진 거지요. 깜짝 놀라 달려가서 녀석을 건져냈지요. 그 구멍은 사람이 풍덩 빠질 만큼 상당히 컸어요. 그런 숨구멍이 저수지의 어딘가에는 꼭 몇 군데 있거든요. 다행히 그때 우리는 깊은 데로 멀리 가지 않고 수심이 얕은 가장자리 쪽에서 썰매를 탔기 때문에 구해낼 수 있었지요.” 저수지도 숨을 쉰다…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얼음장 밑에 있는 물고기나 수초 등의 생명체에게 산소를 공급해주기 위해서 저수지가 스스로 군데군데 얼음이 전혀 얼지 않는, 둥그런 숨구멍을 마련한다는 얘기다. 옛 시절 저수지 부근에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좀처럼 얻어듣기 어려운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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