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지리산 자락의 유려한 능선, 맑은 하늘과 흰 구름까지 지상의 풍경을 고스란히 물그림자에 담고 있는 논에 모를 심는다. ‘착착착착’ 이앙기의 규칙적이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파릇파릇한 모가 논에 심겨 물결에 흔들린다. 논둑과 맞닿아 이앙기가 미치지 못한 곳에선 한 여성농민이 직접 손모를 내고 있다. “심든 안 심든 밥 한 공기 차이”라며 논 구석구석에 손모를 내는 수고로움을 덜했으면 하는 바람에 참견도 해보지만 여성농민은 좀처럼 허리도 펴지 않은 채 묵묵히 모를 잡고 있다. 선선한 바람이 일손을 가볍게 하지만 여성농민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지난 10일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의 한 네모반듯한 논에서 모내기가 한창이다. 올해 일흔여섯, 양씨 부부의 논에 이앙기를 끌고 와 모내기를 하고 있는 이창호(49)씨는 ‘산내일꾼’으로 통하는 이다. 논 갈고 로터리치고 모판 준비에서 모내기까지 일련의 논 작업 모두를 대행하고 있다. 같이 손발을 맞춰온 태국인 노동자와 더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태국어까지 습득한 열혈 농사꾼이기도 하다.
오늘만도 예정된 모내기가 다섯 집. 양씨 부부의 네 마지기(800평) 논이 이날 첫 모내기다. 지난달 20일께부터 모내기를 시작해 매일 같이 산내면 곳곳을 누비며 비어있는 들판에 모를 심고 있다. 이씨는 “70~80대 어르신들이 주로 작업을 맡겨 주신다. 산골이라 농지 규모도 작아 논 서너 마지기가 대부분인데 어르신들이 모내기철, 추수철에 한 번씩 쓰기 위해 이앙기, 콤바인 등 비싼 농기계를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며 “오래전 어머니께서 추수를 앞두고 콤바인을 불렀는데 논에서 길을 보며 사흘을 기다려도 연락도 없이 기사가 오지 않은 적이 있다. 그때 직접 (농작업 대행을)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날 모내기를 의뢰한 양씨도 “매년 창호가 잘해주니 논에 오는 건 물이 말랐나 안 말랐나 확인하러 올 때뿐”이라며 “이제 한 사흘 있다가 두세 줄씩 잡고 뜬모도 다시 심고 빈 곳마다 모를 때우면 모내기는 정말 끝”이라고 말했다.
예로부터 농민들은 모내기를 해야 발 뻗고 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내기는 일 년 농사를 좌우하는 핵심으로 통한다. 모를 다 심고 이앙기가 빠져나온 논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양씨. “술 한 잔 안 먹을 수 없지”하며 그가 종이컵에 부어 마신 맥주 한 잔의 시원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늘의 첫 일정, 양씨 아저씨 논에 모내기를 끝낸 이씨 또한 트럭에 이앙기를 싣고 다음 집으로 이동하며 다가올 가을을 기약했다. “올봄부터 기후가 이상하다고 하는데 큰 재해나 질병 없이 무탈하게 농사가 잘 지어졌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양곡관리)법을 거부할 땐 정말 욕지거리도 해댔지만 농민들에게 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올가을엔 쌀값도 보장받고 농민들도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45년 만에 최대치 쌀값 폭락에 이은 대통령의 양곡관리법 거부권 행사 등 그 어느 시대보다 쌀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사회지만 여전히 농민들은 황량했던 들판을 초록으로 물들이며 이 나라 주식인 쌀 생산을 위해 오늘도 손 한 뼘 크기의 모를 심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 밥술 뜨는 이들이라면 이 좋은 봄날, 논일 밭일에 파묻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농민들의 땀과 노고를 오롯이 기억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