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배 밭에서 세상을 솎아내며

  • 입력 2023.05.14 10:04
  • 수정 2023.05.14 10:05
  • 기자명 김성보(전남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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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보(전남 나주)

눈을 떠보니 창 너머 동쪽 볕이 밝아왔다. 오늘 하루 일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습관처럼 핸드폰 날씨 앱을 켰다. 바람 방향, 속도를 시간대별로 훑어본다. ‘음~ 오늘 배 밭에 방제는 배 솎음(적과)이 끝나자마자 오후 6시부터 시작해야겠군.’

농약살포 계획부터 확인한다. 5월 4일부터 4일 동안 때 아닌 봄 장맛비에 배 밭에 흑성병 발생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전국의 배 농가는 지난 4월 극심한 냉해로 착과가 매우 안 좋은 상황이다. 나주지역 일부 밭에서는 유통 상인들의 밭떼기 거래 문의가 들어올 정도로 가을 수확에 비상이 걸렸다.

오늘 베트남 계절노동자 6명, 미얀마 외국인노동자 2명, 한국인 3명이 우리 밭에 배 솎음을 하러왔다. 작년까지는 최대한 한국인 지역 내 여성농민을 썼는데 올해부턴 나도 어쩔 수 없다. 동네 엄마들은 대부분 80세가 넘어 진작에 그만두셨고, 그나마 면지역 형수님들이 버텨왔는데 각자 농사일도 바쁘고 몸도 아파서 바야흐로 외국인 계절노동자와 함께 적과하고, 배 봉지도 그들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5월 초순에 시작하는 배 솎음 작업은 배농사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동전 크기만 한 배를 솎아내면서 수많은 사색과 성찰을 한다. ‘요놈은 못생겨서 아웃, 요놈은 삐뚤해서 아웃, 요놈은 목 줄기가 가늘어서 아웃.’ 그러다가 ‘크고 예쁘고 목 줄기도 실하디 실한 이놈이 좋겠군’하며 하루에 1만개 이상의 불량과를 따낸다. 나는 이 순간이 제일 흐뭇하다. 대한민국 검사가 판치는 검찰공화국의 대통령은 제멋대로지만 내 과수원에서는 적어도 내가 대통령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지난 세월동안 내가 뭘 한 거야?’ ‘도대체 민주주의는 죽은 거야?’ 정말이지 맘대로 달리는 윤석열 검찰공화국에서 농사의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자며 청춘을 다 바쳐 데모 현장을 누비고 다녔는데, 윤석열 검찰 권력이 벌써 1년이 되었다. 살아온 삶에 후회는 없지만 비통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다. ‘이명박근혜’를 촛불항쟁으로 탄핵시키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 믿었는데, 죽었다고 생각한 수구보수 기득권이 검찰 권력까지 무장해 당당하게 민주주의 선거 허울을 쓰며 탄생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윤석열 1년 동안 농민과 농업, 농촌은 대한민국 정부 국무회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떠들썩했던 양곡관리법은 공산화법이니 자유시장 질서에 맞지 않다며 대통령 거부권 1호라는 불명예만 남기고 말았다. 대통령이 농민을 무시한 것을 넘어 일본총리와 만나 맥주나 마시고, 미국대통령이 초대한 만찬에서 노래나 부르며 일제 식민지배 면죄부나 주고, 미국 아메리카 찬가를 부른 대통령을 보며 끓어오르는 굴욕감을 과연 나만 느끼는 것일까. 미국에 포탄 50만발을 땡처리해서 결국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터에 한국 포탄이 사용될 것이 불 보듯 뻔한 데 한국방산의 자랑이라니…. 정말이지 전쟁에 휘말려드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일본 기시다 총리가 독립 애국열사들이 있는 현충원에 참배를 하게 하다니, 도대체 윤석열은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내 나이 55살, 지난 35년 동안 5.18학살자 전두환·노태우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정부수립을 이루며 우리 자녀세대에게는 통일된 남북을 물려주고 세상 걱정 없이 살게 하고 싶었는데, 내 삶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참담함에 생각이 깊어만 간다. 과연 역사는 진보하는가. 정녕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오늘도 나는 배 솎음을 한다. ‘굴욕외교 미친놈 아웃, 전쟁불사론자 아웃, 검찰독재자 아웃, 식민지배 찬양론자 아웃, 농민·노동자 개무시론자 아웃, 대통령권력 남용한 자 아웃, 찌질이배, 삐뚤이배, 서리맞은배, 이놈들은 모두 아웃이다’ 내 손 안에서 세상이 바뀌고 있다. 아~ 속이 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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