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양간에서 목욕하던 생각

  • 입력 2008.12.22 09:59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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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몇 사람이 모여 점심을 먹다말고 무엇 때문에 목욕탕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밥이 나오기 전에 먼저 소주를 홀짝거리다가 어린 시절 집에서 목욕하던 ‘목욕통’ 이야기를 했고 식사가 끝나고도 한참이나 6-70년대 목욕탕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점심을 먹은 자리가 옛날 목욕탕 자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가끔 이곳 목욕탕을 이용하곤 했는데 이 목욕탕 불목하니는 고등학교 친구의 아버지이기도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처음으로 공중목욕탕을 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문득 얼굴이 붉어집니다. 아마도 고등학교 1학년 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영천 염매시장의 2층 목욕탕에 생전 처음으로 들어간 촌놈은 발가벗는다는 너무도 당연한 그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 사각팬티를 입은 채로 몸도 씻지 않고 탕 속으로 들어가다가 어른들에게 된통 야단을 맞았던 것이지요. 그 어른들에게 저란 놈이 일자무식을 넘어 천하무식으로 보였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몇 사람만 들락거리면 허연 때가 둥둥 떠다니는 탕 속으로 사타구니도 똥구멍도 씻지 않은 후안무치의 몸뚱어리를 들이밀다니요.

“야 이놈아, 불알이나 좀 씻고 들어오너라.”

얼굴에 주름이 많은 어른은 그렇게 점잖은 말투였지만 나이가 저보다 대여섯쯤 많은 젊은 사람들은 대번에 육두문자를 날리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걸핏하면 으슥한 골목에서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어린 학생들을 붙잡아 주머니를 털어 내곤 하던 그 ‘형빨’들이었으니까요.

목욕이라면 무엇보다 어린 시절의 외양간이 떠오릅니다. 우리들 60년대와 70년대 중반까지 겨울이면 몸에 켜켜이 쌓인 때를 벗겨내던 집에서의 목욕은 곤욕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소물솥에 펄펄 물을 끓이는 동안 아버지는 외양간의 소를 밖으로 몰아내거나 아니면 고삐를 구석 쪽으로 바짝 당겨 매어두고 소죽통(저는 ‘쇠죽솥’, ‘쇠고기’라고 쓰지 않습니다)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냅니다. 우리 집 소죽통은 아름드리 소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것으로 어린 우리가 들어가 앉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목욕을 하는 날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소똥 냄새가 진동을 하는 자리에 짚을 두툼하게 깔고 그 위에서 발가벗은 채로 견디는 일은 정말이지 곤욕이었습니다. 소죽통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 배꼽 위로 드러난 살갗을 저미는 겨울바람과 소똥 냄새에 진저리를 치며 튀어나오면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치던 어머니의 손바닥은 또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가 꼬리를 흔들어 얼굴을 때리거나 고삐가 느슨하게 풀려 혓바닥으로 등짝을 핥을 때면 기겁을 하고 해울음을 울었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엉덩이를 제 쪽으로 바짝 들이대고 똥을 싸기도 했는데요, 그때마다 저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일입니까.

장난 좋아하는 제 형은 혹시라도 목욕탕이 조용하면 막대기로 공연히 소를 건드려 동생들이 고래고함을 지르게 하였습니다. 형의 손에 들린 막대기가 소 엉덩이를 찌를 때마다 소는 뒷발을 옮기면서 꼬리로 낮은 천정을 때려 먼지가 눈처럼 쏟아지기도 했지요.

생각하면 참 아득하게 먼 옛날입니다. 그렇게도 목욕을 할 자리가 없어 외양간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아득한 그 흑백 풍경이 그러나 정겨워지기도 합니다. 우리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차지했던 그 소는 생명이 다하고 난 뒤에 북으로 다시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에서 둥둥둥둥! 새 세상을 열어가는 북소리가 되어 천지를 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요. 멀리서 소가 울어 달려오는 북소리를 듣습니다.

물지게로 물을 져 날랐던 아버지는 벌써 북망에서 흙으로 돌아가고 등짝을 후려치던 어머니는 늙어 온몸이 어눌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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