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와 코 집

  • 입력 2008.12.15 08:29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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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들은 기막힌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어느 겨울, 그야말로 해가 노루 꼬리만큼 남아 있는 저물녘에 늙은이들 몇이 동네 구판장에서 무료하게 술추렴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는 벌써 며칠이나 되어서 시큼털털하고 안주래야 굵은 소금에 고춧가루를 뿌려놓은 것 뿐입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산에 가서 나무 한 짐 해다 놓고는 구판장으로 나와 각자 돌아가며 막걸리 한 되씩 사서 마신 것으로 해동갑하게 되었지요. 저마다 앞에 놓인 막걸리 잔을 비우면 곧장 일어나야 할 형편입니다.

아직 술은 많이 미진한데 누구 하나 선뜻 내가 한 되 더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마지막 잔을 비우지 못하고 고개 외로 꼬고 앉아 딴청을 부립니다.

집에 돌아가 봐야 호롱불 심지를 돋워 입맛이 까칠한 보리밥 한 그릇 먹고 나면 길고긴 겨울밤을 견딜 일이 난감합니다. 가는새끼를 꼬아 가마니 짤 준비를 할 일도 심드렁하고 베 짜는 마누라 도울 일도 없는 집에 돌아간다는 것이 감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이, 누가 나하고 내기 한번 함세.”

길게 이어지던 무거운 침묵을 깨며 누군가가 불쑥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섰습니다. 열여섯에 아들을 낳아 오형제를 거느린 금산어른입니다.

풀린 눈빛을 천정으로 혹은 방바닥이나 담배연기에 찌든 바람벽으로 던져 놓고 있던 사람들이 생기를 되찾으며 살아납니다.

“무슨 내기?”

필터 없는 담배를 꺼내 물다가 혓바닥에 달라붙는 담배가루를 뱉으며 금산어른은 잠시 비장한 얼굴로 뜸을 들입니다.

“내가 코를 벤다면 누가 술 한 말 사겠는가?”

“으잉? 자네가 자네 코를 짜른다꼬?”

모두가 뜨악해진 얼굴로 금산어른을 쳐다봅니다.

“그래. 내가 내 코를 짤라 보임세. 그러면 누가 술 한 말 사겠나?”

금산어른은 검지 끝으로 콧구멍을 찔러 치켜들며 자신만만한 표정이었습니다.

“마 치아라, 이 사람아. 친구 코를 짤라 술 한 말 마셨다고 신문 날 일이네.”

모두가 다시 눈에 생기를 잃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데 아까부터 그 말에 무슨 함정이 있지나 않나 싶어 곰곰 생각하고 있던 꾀돌이 치동어른이 바닥에 놓인 막걸리 잔에 손가락을 넣고 휘휘 저어 꿀꺽 마시더니 손가락을 한번 쪽 빨고는 호기롭게 나섭니다.

“오냐, 짤러라. 내 술 한 말 낸다. 그런데 그 코 못 짜르면 니가 한 말 사지?”

“그래. 못 짜르면 내가 산다. 보소, 여기 정지칼 시퍼렇게 갈어서 좀 가져 오소.”

금산어른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구판장 안주인을 불러 칼과 도마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칼과 도마를 가지고 오라 합니다. 곧이어 술독에 쓱쓱 몇 번 문지른 칼과 도마가 당도하고 방안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합니다. 누구는 왜 그따위 내기를 하느냐고 만류하고 또 누구는 코 베어내면 담배 맛이 안 좋으니 그 전에 담배나 한 대 피운 뒤에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오른손에 칼을 쥐고 눈 감은 채 앉아 생각에 잠긴 금산어른 표정은 그야말로 비장한데 지금이라도 술 한 말 사고는 그만 두라고 누군가는 징징댑니다.

이윽히 앉아 있던 금산어른 어느 순간 왼손으로 코를 쥐고 슬쩍 몸을 비틀더니 고함소리와 함께 도마 위로 엎어집니다.

구판장 안주인의 찢어지는 비명에 사람들은 후다닥 뒤로 물러났고 그 사이로 패앵, 코푸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금산어른 얼굴을 들더니 칼로 도마를 힘껏 내려칩니다.

아아, 거기 도마 위에는 칼날에 잘린 고름덩이처럼 누런 걸쭉한 코가 놓여 있었습니다.

“뭐야? 이건 콧물이잖아!”

얼굴이 벌겋게 된 치동어른이 금산어른에게 담배연기를 꾸역꾸역 토해내는 코를 가리키며 태연하게 말합니다.

“이건 코가 아니라 코 집이야, 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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