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저수지④ 붕어는 저수지를 탈출하고 아이들은 일상을…

  • 입력 2023.05.01 00: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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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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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어느 봄날, 개심저수지 인근의 장화리에 사는 윤용병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보를 툇마루에 던져놓고는 헛간으로 내달아, 무엇인가 뒤지고 꺼내고 하느라 정신이 없다.

-학교 댕게 왔으면 뒷산에 가서 풀이나 한 망태 비오거라. 씰 디 없는 해찰 부리지 말고.

돼지 먹일 풀을 베어 오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대꾸가 없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진다.

-엄니 샘에 갔다 올 것잉께, 딴 디 가지 말고! 일하기 싫으면 밥도 묵지 말어야제.

소년 윤용병은, 물동이를 이고 사립을 나가는 어머니의 등 뒤에 대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일하기 싫으니께 밥은 안 묵고, 대신에 물고기를 잡어묵어야 쓰겄시유. 가만있자, 대나무 낚싯대는 여그 있고, 잇갑(미끼) 담을 깡통을 어디 뒀드라….

“꼬맹이들이래도 낚시질 준비는 야무지게 했어요. 며칠 전에 남의 집 대나무밭에 가서 몰래 한 그루 베어다 말려서 낚싯대를 장만하고, 엄니 반짇고리 뒤져서 실패에 감겨 있는 명주실 두어 발 끊어서 낚싯대에 묶으면 낚싯줄은 됐고, 지렁이 담을 깡통도 챙기고…. 낚시질을 애들만 했느냐고요? 에이, 어른들은 농사 신경 써야지 한가롭게 낚시질할 새가 어디 있어요.”

당시에는 전문 낚시꾼들이 호수나 저수지 등지를 돌아다니며 낚시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수지의 물고기는 인근 마을 주민들이 어쩌다 짬이 나면 나가서 몇 마리씩 잡아 오고는 했다. 그나마 어른들은 농사일에 바빴기 때문에, 주로 아이들이 낚싯대를 메고 저수지로 나갔다. 재수가 좋은 날은 잔챙이 붕어 말고도 큼지막한 잉어도 낚아 올렸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 시절 농촌에서는 아이들도 거들어야 할 집안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해질녘에 집에 돌아갈 때면 어머니의 부지깽이 욱대김을 각오해야만 했다.

현재(2003년 당시) 장화리의 이장 일을 맡아보고 있는 윤용병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여름 어느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학교 가는 길이었는데, 논바닥이 물고기 천지가 돼 있는 거예요. 저수지 물이 불어 넘치는 바람에 팔뚝만한 잉어하고 붕어들이 인근 볏논으로 흘러들어와서 파닥거리고 있었던 거지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내 녀석들 일고여덟 명이 논으로 뛰어 들어가서 고놈들 잡는다고 첨벙거리다 보니 벼포기가 마구 짓이겨지고…그러고 있는데 논 주인이 달려왔어요. 한바탕 혼찌검이 났지요.”

논 주인은 아이들의 책보와 가방을 모두 압수하여 학교로 가지고 가버렸다.

-얼릉 학교에 가자. 인자 우린 선생님한테 죽었다.

-그럼 저 물고기는….

-혼날 때 혼나드래도 심들게 잡은 고기를 놔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제.

누군가 볏논 들머리에서 비료 포대를 가져왔고, 아이들은 길바닥 위로 던져놓았던 물고기를 포대에 담은 다음 언덕으로 올라갔다. 몇몇은 땔감을 주워오고, 누군가는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의 라이터를 몰래 가져왔다. 또 누군가는 논두렁에서 녹슨 철사를 주워왔다.

“석쇠가 없으니까 녹슨 철사로 물고기 아가미를 조르라니 꿰어서…요샛말로 하면 바베큐 요리 그런 걸 한 거예요. 껍질이 꺼멓게 탄 생선 한 마리씩을 들고서 허겁지겁 살점을 뜯어먹고 있는 어린 촌놈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허허허. 내가 평생 먹어본 민물고기 요리 중에서 최고로 맛있었어요. 아, 학교 가서 혼 안 났느냐고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겠어요?”

-시방 장화리에서 온 놈들 다 나와! 요 녀석들이 수업을 두 시간이나 빼 먹고, 남의 논바닥은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느그들은 인자 죽었다. 손바닥 펴!

손바닥에 불이 났다. 그런데 3교시가 끝나자 장화리 아이들을 따로 부른 선생님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지금도 느이 동네 가면 저수지를 뛰쳐나온 물고기들 잡을 수 있는 것이여?

-물론이지유! 얼마든지 잡을 수 있어유!

-그러면 말이다, 오후에 선생님들 몇 분 올라갈 테니까, 미리 몇 마리 잡어놔. 알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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