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당신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 입력 2023.04.30 18:00
  • 기자명 금창영(충남 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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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여(충남 홍성)
금창영(충남 홍성)

 

별로 즐기지는 않지만 헐리우드의 재난영화는 나름 거대한 스케일을 앞세워 보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재난영화를 보면서 일정한 형식을 발견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주인공과 동료들이 닥쳐올 재난을 이야기할 때 많은 이들이 무관심하다.

막상 재난이 닥치면 여기저기서 생존을 위한 노력들이 시작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재난을 멈출 약한고리가 등장하고, 주인공과 동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그곳으로 간다. 문제를 해결하고,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경우의 수가 등장한다. 가령 모두 구출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공간에 누군가 남겨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군가 다시 돌아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는 아무래도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 순간 누군가가 본인이 그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다. 한바탕 소동이 있고 결국 그는 다시 돌아간다.

그 희생 덕분에 세상은 일상을 되찾는다. 이제 남겨진 이들은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2022년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까지 대략 8개월 정도 ‘기후위기와 농업’이라는 주제로 농민들을 만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기간 대략 20여명의 농민들을 만났다. 경작규모도 다양하고, 작물도 다양하며, 농법도 다양한 이들이다. 짧게는 1시간부터 길게는 3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 시간의 대부분은 하소연이었다.

그렇다. 바로 지금 당신이 추측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힘들다. 어렵다. 답이 없다. 좋은 이야기도 2~3시간 듣는 것이 쉽지 않은데, 속상하고, 힘든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면서 듣는 것은 꽤나 힘겨운 작업이다. 그 과정 중에 종종 이런 생각이 들었다.

‘농사짓는 나도 이렇게 힘든데, 연구자나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정말 이런 말하면 안 되지만, 농촌과 농민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이제 지겹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렇게 힘들면 다른 직업을 가지면 될 텐데’라거나 ‘누가 농사지으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누군가를 탓하면서 그렇게 살아야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대한민국에서 농민으로 살면서 억울하고 속상하지 않은 일이 어디 한 두가지인가?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친환경농업 인증제도이다. 내가 사용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 30년 전에 사용한 농약성분이 나와도 내가 책임져야 하고,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농약성분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1997년 12월에 만들어진 ‘환경농업육성법’이 29번의 개정을 통해 친환경농사를 짓는 농민의 입지를 점점 줄여왔다. 이 모양이 되도록 당신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앞에서 이야기한 인터뷰 과정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농민으로서 어떤 대안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대부분의 농민은 ‘정부나 연구자·전문가들이 대안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열심히 하는 농민들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농민이 이런 존재가 되었구나. 누군가 대안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지원해주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 때 당사자인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동원하고, 지도하고, 교육하고, 돈 몇 푼 쥐어주면 따라오는 존재로 보는구나. 이래서 우리가 동의하지 않은 희생을 저들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구나.

그러니 지금 우리에겐 두 가지 길이 있겠다. 정부가 현장을 모른다느니, 탁상행정이란 말은 꺼내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하고, 인증이 취소되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쥐꼬리만 한 보조금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저들을 꾸짖고, 내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주체로 나서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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