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저수지③ 가뭄, 물싸움 그리고 기우제

  • 입력 2023.04.23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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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걸 누가 모르랴만, 그러나 당연해 보이는 그 물리 혹은 자연법칙이 못내 원망스러운 사람들이 있었다. 저수지 위쪽에 농지를 둔 농민들이 그들이었다.

봄부터 가뭄이 들었다. 하지만 충청북도 옥천의 개심저수지에는 아직 물이 넉넉했다. 저수지는 그럴 때 이용하라고 있는 시설인데, 저수지 바로 위쪽 장화리 마을 주민들은 갈라진 논바닥을 바라보며 한숨만 짓는다. 마을의 전답들이 저수지 수면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넘실대는 저수지를 턱밑에 두고도 목말라 해야 하는 것이 장화리 마을 주민들의 숙명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을 뒤편에 있는 천연 소류지(沼溜地)의 물을 서로 끌어대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물싸움은 멱감으러 간 아이들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의 물싸움은 자못 살벌했다.

-어디, 간밤에 논바닥에 물이 좀 찼나 보자. 어라? 이것이 뭔 일이여! 어이, 춘삼이! 이런 숭악한 물 도둑놈을 봤나! 어지께 해거름에 내가 분멩히 우리 논에 물을 대놓고 집에 갔는디, 도둑고양이 맨치로 밤중에 와서 지 논으로 몰래 물꼬를 돌려놓다니!

-뭐, 도둑고양이? 안 그래도 수량이 적어서 찔찔 내려오는데 우리 논은 어느 세월에 대라고?

-우리 논에 댈 순서였으니께, 일단 물이 차고 나면 그때 물꼬를 돌려야제, 이런 기냥 콱!

-삽 저리 치우지 못하겄어? 이놈이 사람 치겄네!

“윗논 주인이 자기 차례가 와서 논에 물을 대놓고 집에 갔어요. 그런데 아랫논 쥔장이 와서 보니 자기 논에 물 댈 차례는 멀었지, 심어놓은 모는 타들어 가지…. 그래서 밤중에 몰래 자기 논으로 물길을 슬쩍 돌려놔요. 그럼 뭐 다음 날 들판에서 대판 쌈이 벌어지는 거지요.”

물꼬를 서로 자기 논으로 돌려대려는 그 ‘물싸움’은 농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조카뻘 되는 사람이 당숙뻘 되는 윗사람하고도 언성을 높이며 맞대거리를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물싸움으로 감정이 상해서 앙앙불락하던 양쪽 당사자를 단박에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때맞춰 비가 내려 주는 것이다.

-히야아, 이게 얼마 만에 내리는 단비냐, 허허허….

-그러게 말이다. 어이, 물 도둑놈! 우리 집에 막걸리 받어논 것 있으니께 따라와!

-이런 벼락맞을 놈, 끝까지 도둑놈이라지, 허허, 허허허….

경지정리와 수리시설이 잘 돼 있지 않았던 당시에는 봄 가뭄이 심한 경우, 아예 벼농사를 작파하고 논에다 콩이나 수수 등 잡곡을 심기도 했다. 그러나 벼가 한창 자라야 할 여름철에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동네 뒤편의 소류지마저 바닥을 드러내 버리면 농민들의 속도 함께 타들어 갔다. 그쯤 되면 자연스레 나오는 얘기가 있다.

-아, 하늘 쳐다보면서 한숨만 쉰다고 비가 오남! 정성을 들여야지!

-정성을 어디다 어치케 드린대유?

-기우제를 지내긴 지내야 쓸 모냥이구먼.

-동네 돈 뫄놓은 것 없으면 집집마다 거출을 해서래두 제를 올리자구.

-하늘에 대고 제사 지낸다고 마른하늘에서 비가 오남유. 다 미신이지유.

-에이끼, 이 사람, 부정 탈라고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함부로….

강우(降雨)를 기원하는 기우제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그 내력이 깊고, 지방마다 제례의 형식이나 절차도 각각 달랐다. 장화리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호별로 얼마씩 거출을 해서 떡도 하고 돼지도 큰 놈으로 한 마리를 사요. 주민들 중에서 손 없는 사람으로 제주(祭主)를 선정해서 기우제를 주관하게 하지요. 동네 청년들이 돼지를 통째로 계곡으로 운반해서는, 평소 물이 많이 흐르는 냇가에서 일단 돼지를 잡은 다음에, 그 피를 바위 여기저기에다 발라요.”

그런 다음에 다른 제물들과 함께 제사상을 차리고, 제주가 비를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하는 방식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이제 비가 오고 안 오고는 하늘의 소관이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정성을 다 바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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