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사과 꼭지에 달린 ‘트롤리 딜레마’

  • 입력 2023.04.23 18:00
  • 수정 2023.05.27 14:23
  • 기자명 권혁정(경북 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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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정(경북 의성)
권혁정(경북 의성)

16년 전 사과 농사를 처음 시작하던 해 사과 수확 시기 신기한 장면을 봤다. 농민들이 사과를 따서 과수원에 한가득 쌓아 사과 언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왜 사과를 따서 상자에 바로 담지 않고 쌓아 놓느냐 물으니 사과 꼭지를 절단해서 담아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하고, 여러 번 옮겨 담는 번거로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라 답했다.

사과 수확(만생종 후지 기준)은 10월 하순에서 11월 초순까지 끝내야 한다. 11월 초에도 영하 5~6도까지 떨어지는 해가 종종 있어 사과가 얼어버리기 전에 나무에서 다 따야 한다. 일손은 부족하고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 일단 사과를 다 따서 과수원에 쌓아 두꺼운 보온 덮개로 덮어 두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꼭지를 하나하나 다 절단해서 사과 상자에 옮겨 담는다.

사과를 따서 상자에 바로 담으면 일주일이면 끝날 수확 작업이 2주일가량 걸린다. 사과 꼭지를 절단하지 않으면 인건비도 시간도 엄청 절약되는데 왜 꼭지를 꼭 절단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방식을 따라 사과를 따서 쌓아두고 꼭지를 하나하나 절단해서 상자에 담았던 기억이 있다.

사과 꼭지에 달린 트롤리 딜레마! 트롤리 딜레마는 어느 한쪽의 희생을 담보로 다른 쪽의 이익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이다. 사과 생산 농가들은 사과 수확 시 사과에 달린 꼭지를 절단하는데 수확기 인건비 3분의 1을 쓴다. 전국 사과 농가를 합치면 수백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농촌의 고령화로 인해 농촌 인력이 부족하고 인건비 또한 자연스레 상승하고 있다. 앞으로 생산비용은 더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희생, 즉 생산자인 사과 농가들의 수백억 비용이 소비자의 이익으로 돌아가야 선택의 딜레마에서 한쪽의 이익에 손을 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과를 먹는데 꼭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없기에 생산자의 희생이 소비자의 이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부 농가에서는 택배로 직거래를 하거나 박스 포장을 해서 출하하는 경우 꼭지를 절단하지 않고 유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과 농가들이 꼭지를 치는 건 사과 선별과정이나 유통과정에서 꼭지에 찔려 상처가 나고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중간 유통 상인이나 도매시장에서 꼭지를 제거할 것을 농민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이 아닌 유통과정의 이익을 위해 수백억의 희생을 농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농민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첫째, 사과를 상자째 부어 선별기에 돌리는 기존 선별 과정을 개선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 부딪혀 멍이 들고 상처가 난다. 비용과 시간이 들더라도 사과 하나하나 선별하는 스마트 트레이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소비자의 인식 전환이다. 꼭지 절단은 미미하나마 사과의 신선도에 영향을 준다. 조금 더 신선하고 자연그대로의 사과를 소비하는 것이 농민들의 희생을 줄이는 상생의 방법임을 소비자가 인식하고 도와줘야 한다.

셋째, 정부가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유사한 사례로 수박을 들수 있다. 유통 상인들의 요구로 수박은 T자 형태의 꼭지가 있어야만 유통을 했던 적이 있다. T자 형태의 꼭지를 만들기 위해 농민들은 정부에서 금지하기 전까지 수확의 번거로움과 비용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쩌면 지난 100년의 사과 재배 역사에서 농민들은 약자의 입장에서 내 물건을 사가는 상인들의 요구를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 왔는지 모른다.

모든 생산 비용과 인건비가 급상승한 요즘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과 꼭지를 절단해야 하는 대한민국, 과연 누구를 위한 꼭지 절단인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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