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저수지② 우리 고장에 ‘개심저수지’가 생겼다

  • 입력 2023.04.16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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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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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의 어느 봄날, 충북 옥천군 이원면 장화리 바로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던 평지말(평지마을)의 동각(洞閣) 마당에 아침부터 주민들이 모여있었다, 남정네들은 담벼락 아래 삼삼오오 쪼그려 앉아 한숨 섞인 담배 연기만 내뿜고 있었고, 여인네들도 수심 가득한 얼굴로 무슨 얘기인가를 두런거리고 있었는데…. 꽃피는 봄날이었지만, 분위기로 보아 경사스러운 일로 모인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이윽고 검은 양복 깃 위로 하얀 남방셔츠 깃을 펼쳐 덮은 차림새를 한 공무원이 등장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별하더니, 연설인지 하소연인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 그러니께 내 말 좀 잘 들어 보시라니께유. 이번에 저수지 공사를 시작해서 그 저수지에 물이 찰랑찰랑 차게 되면, 우리 이원면 일대의 농토가 전부 옥토로 바뀌게 된다, 이 말이어유. 맨날 보리나 콩만 심궈 묵든 밭을 논으로 바꿔서, 인자부터는 우리도 가뭄 걱정 없이 쌀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다니께, 우리 면으로서는 참말로 좋은 일인디….

그러나 공무원의 연설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 속 뒤집어지니께 그놈의 쌀농사 타령은 그만 하드라고! 아니, 저수지를 맹글면 우리 집은 물속에 잠겨버리게 생겼는디, 어디 용왕님 나라에 가서 모심고 벼 타작을 하란 말여?

-다른 동네 사람들 쌀밥 묵게 해줄라고, 조상 대대로 터 잡고 살어온 우리를 보고는 짐 싸갖고 나가라니 그것이 될 소리여 시방!

마을 사람들의 항변이 거칠어지자 공무원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인다.

-살든 집이 물속에 잼긴다는 것이야 서운한 일이지만서두, 여러분들한티는 정부에서, 딴 디로 이사 가서 살 수 있도록 이주비를 지원해 주겄다고 안 합니까. 그라고…아, 정부에서 지시한 일인디,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지 벨 수 있남유.

대(大)를 위해 소(小)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 했으니, 힘없는 말단 공무원에게 대거리를 해봐야 허공에 빈 주먹질하기였다.

“반대가 굉장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대를 이어서 수수 백 년 살아온 고향이 물속에 잠겨서 영 없어진다고 하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느냐고요. 그렇지만 뭐 정부 방침이 그렇게 정해졌다 하니 따르는 수밖에 별 수 있겠어요.”

1936년생 최육근 씨의 증언이다. 결국 그 일대에서도 큰 마을에 속했던 평지말 주민들은 행정당국의 강권에 못 이겨 땅값과 이주비만 받고서 연고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의 몇 가구는 지금의 장화리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이윽고 저수지 축조 공사가 시작되었다. 외지에서 온 인부들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도 일당을 받고 품을 팔았다. 누구 할 것 없이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심지어는 저수지 축조에 극력 반대했던 주민들도 생계를 위해 일당벌이를 했다.

“요즘 같으면 불도저나 포클레인 같은 장비들이 동원되고 대형트럭으로 흙을 운반해서 둑 쌓는 공사를 하겠지만 그땐 그런 장비가 어딨어요.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했지요. 곡괭이로 흙을 파놓으면 그 흙을 ‘구르마’로 실어 날랐어요. 임시 철길을 깔아놓고 그 위로 수레를 끌고 다니며 흙을 운반하기도 했고….”

3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저수지가 완공되었다. 면적이 무려 12만여 평이고, 둘레가 약 5Km나 되는 지금의 개심저수지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덕분에 그 일대의 많은 밭들이 논으로 개답(開畓)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농지가 천수답이라 농사의 풍흉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는데, 저수지가 완공됨으로써 이원면 주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의 ‘타는 목마름’으로부터 해방이 된 것이다.

이제 저수시설이 갖춰졌으니 추수철인 가을이면 면민들 모두가 풍년가를 불렀음직 한데…하지만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생기는 법, 가뭄이 들기만 하면 저수지엔 물이 넉넉히 찰랑거리는데도, 타들어가는 볏논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주민들이 있었다. 저수지 바로 위쪽에 자리한 장화리 주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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