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그럼에도 봄 농사의 시작은 설렌다

  • 입력 2023.04.16 18:00
  • 기자명 신수미(강원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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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미(강원 원주)
신수미(강원 원주)

해가 길어지고, 한낮의 볕이 따가워지고, 동네 밭에 퇴비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면 마음이 바빠진다. 실상 밭에 나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다른 집 밭의 동태를 살피며 머릿속으로 수없이 올해 심을 작물 계획을 세운다.

바야흐로 봄이 온 것이다. 이 짧은 계절에 꼭 챙겨먹어야 할 나물이며, 두릅이며 옻순 등이 돋아나는 것을 살피고 맛보며 새삼 이렇게 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슬슬 걱정이 시작된다.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들 때도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농사 규모가 적어 기계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 웬만한 일들은 괭이와 호미, 낫 그리고 트렁크에 농기구가 가득한 내 승용차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딱 이 시기, 밭을 갈아엎고 고랑을 내고 비닐을 씌울 때는 아니다. 사실 비닐 씌우는 것까지도 혼자 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른 풀들이 엉켜있거나 새로 자라는 풀을 한방에 해치우고, 손쉽게 작물을 심으려면 땅을 갈아엎을 트랙터가 필요하고, 적어도 관리기라도 있어야 한다.

나는 기계가 무섭다. 농약을 안치니 풀깎기는 필수인데, 그나마 예초기도 전기배터리 줄예초기만 쓴다. 트랙터는 엄두도 못내겠고, 관리기를 다루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관리기가 힘이 딸리는 나를 달고 혼자 굴러가다 어딘가 쳐박히는 상상이 먼저 떠올라 몸서리가 쳐진다.

그래서 밭을 갈아야 하는 때가 되면 주변에 밭을 갈아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우선 내 밭은 평수가 적어서 일당을 드리기도 애매하다. 친분을 이용한 지인찬스를 써야 한다. 주변에 이런 부탁 들어줄 사람이 없진 않지만, 난 매번 고민하고 고민한다. 미안하기도 하고, 쏟아지는 잔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내용은 거의 정해져있다. 진짜 혼자 농사지을거냐, 시집 안가는 거냐, 뭐 심을거냐, 진짜 약 안칠거냐, 나중에 수확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등등. 밭 가는 일을 부탁하는 시점부터 밭을 갈고 음료수나 식사를 대접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나는 불편한 질문과 말들을 사회생활 웃음으로 때우면서 버틴다. 그러다보면 고랑이 내 맘에 안들게 만들어져도, 밭 끝까지 잘 갈리지 않아도 그냥 ‘고맙습니다~ 네, 잘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마무리한다.

혼자 사는 삶이 행복하고, 끝도 없는 ‘시집 안가냐’라는 잔소리를 쳐내고 잘 살아왔건만, 농사일에서 힘쓰고, 기계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남편’이라는 존재를 아주 잠깐 떠올리게 된다. 결혼한 사람들이 부러운 경우는 거의 없지만, 작년에 결혼한 동생이 전화해서 남편이 밭갈고, 두둑 만들고 비닐까지 깔끔하게 씌워줬노라며 자랑할 때는 이래서 농사 지으려면 결혼해야 한다고들 하시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봄이나 여름 수확 후 내 밭을 갈아주신, 그리고 갈아주실 농민회 형님들께 미리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 조그만 밭떼기 정리해주러 한참을 트랙터를 타고 달려와 주실 때마다 항상 나는 눈물나게 고맙고 황송하다. 잔소리도 다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평소에도 잔소리에 치이고 사는 주고 받는 계산이 정확해서 안부도 물을 필요 없는 도시의 건조한 관계가 잠깐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마 물려받은 기반 없이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사꾼이나 혼자 농사를 짓는 소농 특히 여성이라면 봄농사 시작할 때마다 남의 손을 빌려야 시작할 수 있는 농사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밭을 갈고나면 이제 오롯이 내 힘으로 심고 키우고 거둬야 할 일 년 농사 시작이다. 시내 교차로에 걸린 ‘쌀이 남아도는데 왜 사주냐’는 현수막을 보며 화가 치솟아 울컥거리는 세월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봄 농사의 시작은 언제나 설렌다. 봄을 맞이하는 들녁에 서 있는 우리 농민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라겠는가. 그저 내년에도 농사지을 수 있길, 농민이 흘리는 땀의 가치가 제대로 대접받기를 바랄 것이다. 내년에도 살아남아 잔소리를 들으며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기를 기대하며, 양곡관리법 전면 개정하라고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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