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은 농민동지들과 얽힌 실타래 … 농민운동사 연작이 꿈”

인터뷰 l 박홍규 화백

  • 입력 2023.04.14 09:00
  • 기자명 김수나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만화에서 목판화·한국화까지 넘나들며 농민의 삶에 천착해 ‘농민화가’가 된 박홍규 화백(65, 사진). 2008년 4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10년 넘게 <한국농정>에 만평을 연재했던 그가 지난 1월 지면에 돌아왔다. ‘다시는 그리기 싫었던’ 청년 화가 박홍규는 결국 그림으로 농민운동 현장을 지켰고 농민화가가 됐다. 지난 7일 초대전 ‘혼비백산 아리랑고개’가 열린 오월미술관(광주광역시 동구)에서 그를 만나 봤다. 김수나 기자, 사진 한승호 기자

박홍규 화백. 한승호 기자
박홍규 화백. 한승호 기자

연재의 고통이 또다시 시작됐겠다. 만평을 기다린 독자들로선 반갑지만 말이다.

우리 회원들은 <한국농정>·<한국농어민신문>·<농민신문> 3개가 오면 다른 건 안 보고 만평부터 본다더라. 마감 때까진 술 못 먹는 거 빼곤 힘든 줄 몰랐지만, (마감 앞둔) 수요일만 되면 무기력해지고 머리 아픈 증세가 재발했다. 노년이 불행해진 것 같긴 하다(웃음). 3년 전 그만둔 건 자의라기보단 내 삶의 조건들이 많이 힘들어서였다. 사실 지난 10년은 농업이 거의 파탄돼 간 개방농정의 완성기다. 만평만 모아도 한국 개방농정의 역사가 아닐까 싶다.

‘농민화가’로 불리고 스스로도 ‘농민운동가’라고 한다. 왜 하필 농민운동인가.

제대하고 대학 3학년 2학기에 복학했는데 다시는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전부터 내려가고 싶기도 했고, 그러면 그림을 그려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림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걸 포기했다. 그때 <암태도>(대표적 항일농민운동인 1923년 암태도 소작쟁의를 다룬 송기숙 작품)라는 소설이 나왔다. 군대에서 몇 번을 읽고 나니 드디어 농민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복학하자마자 인연이 있던 기독교농민회를 찾아갔다. 내려가려면 돈이 필요해서 졸업 뒤 1년간 출판사에서 일했다. 1985년 겨울 부여로 내려가 농사짓고 1989년 부여군농민회도 만들었다.

시대가 주목하지 않는 농민을 꾸준히 작품에 담았다. 작품 주제가 달라질 법도 한데?

현장에서 필요했다. 가장 쓰임새 있는 그림이 뭘까 생각할 때 그게 만화였다. 만화를 독학했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결성된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렸다. 그땐 사실 만화 외에 회화나 조각은 생각도 못했다. 현장에서 필요한 걸 그리기 바빴다. 오죽했으면 그때 별명이 ‘야! 뺑기(페인트통)’였다. 시간 좀 나면 그리고 전시회도 몇 번 했다. 그러다 농사가 정말 망해버렸다. 애들 학비조차 벌기 힘들어 야반도주까지 생각했다. 다들 “홍규는 농사지으면 안 된다”고 했다. 빚만 느니 농사는 다 정리하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그게 10여년 전이다. 그때 걱정은 ‘농민 동지들이 인정 안 해주면 어쩌나’였다. 농사 안 지어도 현장을 지키고 싶었다.

작가의 삶에 이르기까지 전농의 존재가 커 보인다. 전농 1~2기 권종대 의장 때인 1991년 문화국장도 맡았다. 박홍규에게 전농은 어떤 존재인가.

농민으로서의 삶을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전농은) 내 삶의 전부다. 아마 피와 살이 아닐까? 나를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시켜주고 지켜준 전부다. 청춘부터 지금까지 사악한 데 빠지지 않고, 올곧이 나를 풍부하게 해준 부모 같은 존재다.

동학농민혁명을 끊임없이 다루고 있다. 최근 작품들에서 주목하는 바는?

처음에는 인물사 중심으로, 다음엔 대둔산 투쟁·장흥부 덕부 탈출도처럼 사건별로 작업했다. 근래엔 ‘당시 조선의 민중은 왜 죽창을 들었나’, ‘총 맞아 죽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하면서 주로 이름 없는 농민군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혹시 동학농민혁명군이 잡혀서 문초당할 때 동학을 탈퇴하고 잘못했다 각서 쓰면 살려준 기록이 틀림없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관군이나 일본군이 가장 좋아하는 게 그거 아닌가. 그래서 찾아보고 동학 권위자들에게도 문의했으나 한 건도 없었다. 아, 그렇다면 이 양반들이 왜 죽창을 들었나, 왜 그야말로 죽음의 길을 스스로 갔나? 그 숭고한 죽음들이 정말 동학 때문이었을까? 그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100년도 넘은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삶이랑 무슨 상관인가. 지금 여기에서 동학은 왜 또다시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있나.

젊어서 공부할 땐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이만큼 살아보니 진보는 ‘쪼까’ 한 거 같지만,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동학농민혁명 이래 두 갑자가 지나도 다시 그때인 듯하다. 요새 그야말로 미국에게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데 그게 반복된다. 당시 동학은 서학과의 대립에서 생겨났지만, 오히려 지금 젊은이들이 더 동학을 찾고 있다. 민족적 토대를 지닌 우리 사상·철학을 찾는 것이다. 서학을 앞세워 밀고 들어왔던 외세의 침략·약탈이란 지점에서 같으니 동학은 현재도 틀림없이 의미가 있다.

“나의 그림이 농민들의 언어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홍규의 예술관은 무엇인가.

내 그림을 온전히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젊을 때부터 현장에서 같이 해온 동지들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다. 작품은 거기에서 나온 생산물이지 온전히 내 안에서 나온 게 아니다. 내 그림은 모든 현장의 동지들과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작품은 사실 누에고치에서 실 뽑아내듯 뽑아낸 것에 불과하다.

이미 수많은 농민의 삶을 담아냈다. 그래도 더 그리고 싶은 게 있다면?

젊을 때부터 잡았던 게 농민의 길 연작이다. 근대부터 일제 강점기 농민 항쟁의 역사와 현대 개방농정 시대까지 농민의 역사를 쭉 정리하려 한다. 아직 숙제다. 동학의 역사는 그 과정의 하나다. 일단 칼을 들었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워낙 방대해 먼저 시작했다. 가능하면 동학은 내년까진 정리할 생각이다. 그야말로 농민 역사의 수많은 현장, 전농 동지들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또 여건이 된다면 해외를 다니며 외국 혁명의 역사도 그리고 싶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