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봄볕 사용 설명서

  • 입력 2023.04.09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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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논에 보리가 잎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상태에서 이삭부터 밀어 올렸다. 가난한 집에 아이가 많다고 봄 가뭄으로 생존의 위기를 감지한 보리가 번식을 서두르고 있다. 벌은 아직 잠이 덜 깼는데 밭 두둑에 심어 놓은 배나무와 자두나무 그리고 복숭아나무도 꽃망울을 열었다. 예년보다 높은 온도 때문이라고 한다. 도로변의 벚꽃을 시작으로 산벚나무들도 연분홍색으로 산을 색칠해가고 있다.

보리 이삭이 올라오고 있는 논에서, 말뚝을 박고 얼기설기 쳐놨던 끈을 걷었다. 내가 끈을 잘라서 거두면 남편은 말뚝을 빼서 트럭에 실었다. 일은 둘이 하는데 누군가 거들어주는 것처럼 가벼웠다. 적당하게 따뜻한 햇볕과 바람이 한몫 거들어 준 덕분이다. 근력을 쓰는 일감이 아니라 심심풀이 놀잇감 정도라도 온종일 논바닥을 걸으면 피로감이 오기 마련이지만 그마저도 싫지 않았다. 근거 없는 긍정이 보이는 듯했다. 등짝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위로까지 받는 기분이 들면서 헤실헤실 마음이 풀어졌다. 봄 햇살에는 알콜 성분이 섞여 있을까?

요즘의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게 안성맞춤이라서 들일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무엇보다 일에 쫓기지 않아서 좋다. 나중에 시간 날 때 처리하려고 미뤄뒀던 밭 주변 정리도 할 수 있다. 밭 도랑의 물 흐름을 방해하는 낙엽이나 나뭇가지 따위도 치웠다. 도랑 너머의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밭으로 넘어오면 밭일할 때 여러 가지로 불편해서 틈나는 대로 낫이나 톱으로 잘라내야 했다. 팔뚝 정도 두께의 나무는 내가 벨 수 있지만 그 이상이 넘는 나무들은 내 힘 밖이라 자연스레 남편을 들볶았다. 무엇보다 전봇대와 연결된 전깃줄이 소나무와 도토리나무 가지에 걸려 있어서 언젠가는 성가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전깃줄에 걸쳐 있는 나뭇가지를 어떻게 정리해야 한다고, 듣기 싫은 노래를 몇 차례 불렀더니 남편이 드디어 전기톱을 사 왔다. 전기톱을 처음 사용하는 남편의 모습이 엉성해서 영 미덥지 않았다. 서너 살 먹은 아이가 칼을 쥐고 휘두르는 것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톱질하는 남편을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무서워서 진땀이 나오고 남편은 힘을 쓰느라 땀이 쏟아졌다.

내가 30cm 정도 되는 톱으로 나무를 벨 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전기톱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혹시나 윙윙 돌아가는 전기톱을 든 채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형 사고가 생길 것 같아 아찔했다. 내 욕심대로 일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그만 해도 될 것 같다고 남편의 의욕을 만류했다. 남편은 그 말을 많이 기다렸는지 금세 전기톱을 챙겨서 내려갔다. 남편을 따라 내려가면서 뒤돌아보니, 정작 전깃줄에 걸쳐 있는 나뭇가지는 그대로 있었다.

작은 둠벙에 물을 가둬서 농사철에 사용하는데 물이 부족해서 둠벙을 넓힐 계획을 하고 있다가 어제는 대형 굴착기 2대를 불렀다. 굴착기 바가지로 한 번 퍼낸 흙이 경운기 짐칸에 담고도 남는다고 했다. 둠벙 확장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남편은 굴착기 기사님한테 큰 나무를 넘어뜨려 달라고 했다. 남편도 전깃줄을 누르고 있는 나뭇가지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굴착기 바가지로 나무 중간쯤을 콕 찍더니 그대로 밀어서 넘어뜨렸다. 순식간에 허벅지 두께의 나무가 뿌리째 뽑힌 광경에서 경이로운 문명의 세계를 본 것 같았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골칫거리를 낫과 톱을 가지고 덤볐던 그동안이 원시적인 종종걸음처럼 무색했다.

몸이 고달픈 호미나 낫질에 익숙하다 보니 기계나 문명을 활용하는 방법 찾기에 더딘 것이 분명하다. 익숙함이란 변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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