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연탄⑦ 연탄가스, 김칫국으로 사신(死神)을 물리치다

  • 입력 2023.03.26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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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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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주인집 할머니가 신혼부부가 세 들어 사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새댁, 자요? 어째 대답이 없나? 새댁 아직 자는 거야?

이번엔 좀 더 세게 두드린다. 그때에야 방안으로부터 졸음에 겨운 목소리 들려온다.

-할머니, 오늘 출근 안 하거든요. 잠 좀 더 자려구요. 왜 무슨 일 있으세요?

-그래그래, 알았어. 아, 일요일이구나, 그럼 더 자요.

할머니가 물러간 뒤, 투덜거리는 ‘새댁’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난 일요일에도 그러시더니…저 할머니는 일요일 아침마다 잠을 깨운단 말이야.

“맞벌이 부부라 늘 잠이 모자랐거든요. 일요일에라도 푹 좀 자게 두면 좋을 텐데, 아홉 시만 되면 ‘새댁, 새댁’ 하면서 자꾸만 방문을 두드려요. 짜증이 나서 하루는 맘먹고 따졌지요.”

그 주인 할머니가 주저주저하다가, 당시 신혼이던 박영숙 주부에게 털어놓은 사연은 이랬다. -사실은 말이야, 작년에 그 방에서 회사 댕기는 아가씨 둘이 자취를 했는데…아, 어느 일요일엔 11시가 다 됐는데도 영 기척이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 집 영감하고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봤더니, 가스에 취해서 비몽사몽 정신이 반쯤 나가 있지 뭐야. 그래서 병원 차가 오고 야단이 난 적이 있거든. 그 뒤로 방구들을 뜯어내고 수리를 하기는 했는데 혹시 또 몰라서….

연탄을 난방 연료로 쓰던 시절에 연탄가스는 가장 끔찍한, 그러나 매우 흔한 불청객이었다. 아침에 앰뷸런스가 가스 중독자를 싣고 병원으로 내달리는 모습은 아주 흔한 풍경이었고, 겨울철이면 뉴스 시간마다 연탄가스 중독사고에 관한 소식이 빠지는 날이 거의 없었다. 실제 가스에 중독되어서 큰 위험에 빠진 적이 있다는 김명희 씨의 경험담을 들어보기로 하자.

“내가 자던 방은, 방문 앞 툇마루가 상당히 높았어요. 어린 조카는 일단 상체를 걸쳤다가 비비고 올라갈 만큼이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엔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문을 열고는, 마루에서 마당으로 굴러떨어져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이름을 부르면서 흔들어 깨우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 말도 안 나오고. 극심한 무기력 증세로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식구들이 모두 마당으로 나와서는 이름을 부르고, 동치미 국물을 떠 오고 난리가 났지요.”

의사 등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실은 김칫국물이 일산화탄소 중독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가스 중독 기미만 보였다 하면 김칫국 사발부터 들이밀었다. 그런데 빈말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김칫국물을 한바탕 들이켜고 나면 한결 나아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1969년 11월 19일치 <동아일보>에는 이런 내용의 사설이 실렸다.

작년 겨울 동안만 해도 500여 명이나 되는 인명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였다. 일산화탄소의 중독으로 인한 희생자 수는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서, 만약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금년 겨울엔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길 것이 염려된다. 소위 ‘살인가스’를 난방 연료로 삼는다는 자체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독립 국가가 된 지 20년이 넘도록 정부나 국민 모두가 속수무책, 겨울마다 ‘살인가스’를 베개 삼고 잔다는 것은 문명국가로서 이 이상의 큰 수치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사신(死神)의 품에 안겨 잠이 들고 사신(死神)의 품에서 잠이 깬다’는 자조적인 말이 식자들 사이에 나돌기도 했다. 연탄가스는 방바닥에 균열이 생겨서만 중독되는 것이 아니었다. 날씨가 저기압일 때에는 굴뚝이 연기를 제대로 뽑아 올리지 못한 탓에, 아궁이 밖으로 흘러나온 가스가 방문 틈으로 새어들어서 온 가족이 중독되기도 했다.

연탄 제조업체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가스 발견탄’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다. 그것을 연탄 위에 올려놓으면, 육안으로도 누출된 가스를 식별할 수 있다고 했는데…하지만 고단하고 바쁘던 그 시절에, 그 ‘발견탄’을 일삼아 챙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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