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연탄⑥ 기억하시나요, 연탄 파동

  • 입력 2023.03.1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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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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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70년대에 각각 한 차례씩의 ‘연탄 파동’이 있었다. 특히 제2차 파동(1973~74년)은 중동의 석유감산 정책에서 비롯된 이른바 ‘오일쇼크’를 전후하여 일어났는데, 도시 서민의 생계에 끼친 타격이 심각했다. 수원 ‘대성연탄’의 김용덕 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오일쇼크로 기름값이 오르니까 정부에서는 기름 대신에 연탄을 사용하도록 대대적으로 계몽을 했단 말예요. 그러자 가수요(假需要)가 더해져서 아예 여름철부터 전국적으로 연탄 사재기 소동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니 가난한 서민들은 연탄 구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 겁니다. 장당 22원 하던 연탄이 30원으로 오르고, 저기 을릉도에서는 80원까지 한다는 보도도 있었어요.”

그러자 3륜 용달차로 연탄을 때어다가 변두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아예 연탄 행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물론 시판 가격보다 비싼 값을 불렀지만, 동절기를 앞두고 불안한 주부들은 값을 얹어주더라도 들여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무렵 서민들 사이에서는 “김장은 못 해도 굶어 죽지 않지만, 연탄은 없으면 얼어죽는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연탄 가게는 대개는 쌀집을 겸하고 있었다. 출근길, 김윤자 주부가 밀창을 열고 들어선다.

-아저씨, 우리 집 어딘지 알지요? 저기 골목 끝집 문간방. 거기 연탄광에 50장만 들여놔 줘요. 돈은 닷새 뒤에 월급 타면 드릴게요.

-안 돼. 지금 연탄이 딸려서 난리라니까. 저기 칠판에 적어 놓은 명단 좀 보라구. 저 사람들이 다 선불 주고 주문한 사람들이야.

-그럼 어떡해요. 지금 달랑 두 장밖에 없는데…. 그럼 오늘 가불이라도 해서 드릴게요.

-순서가 밀려서 안 된다니까 그러네. 공장에서 연탄을, 달라는 양만큼 주지를 않아요.

“변두리 동네에서는 외상으로 들여놨다가 며칠 뒤에 돈 생기면 갚고 그랬단 말예요. 그런데 연탄 파동이 일어나면서는 외상은커녕 100장이면 100장 값을 선불로 줘야 배달을 해줬어요.”

설령 금전적인 여유가 있어서 연탄을 한꺼번에 많이 살 수 있었다 해도, 단칸방에 세 사는 사람은 또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연탄을 쌓아둘 공간이 그닥 넉넉지가 않았던 것이다.

-영이 엄마, 오늘 우리 연탄 들여놔야 하는데, 우리 자리에다 이렇게 쌓아놓으면 어떡해.

-여기가 왜 철이네 자리야. 잘 봐. 여기서 여기까지는 주인아줌마네 자리고, 여기서 이만큼은 저기 끝방 새댁네, 그리고 여긴 우리 집 연탄 쌓을 자리 맞잖아.

-아니, 영이 엄마네는…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일곱 줄이나 쌓아놨잖아!

-원래 우리는 일곱 줄이었다니까 그러네. 아니, 가만, 그런데 우리 연탄 두 장이 어디로 갔지? 내가 분명히 표시를 해놨는데…혹시 철이네가 연탄 떨어졌다고 슬쩍 훔쳐다 땐 것 아냐?

-이 여자가 사람을 뭘로 보고, 누굴 도둑으로 몰라고 그래! .

한 집에 서너너덧 가족이 세 사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비좁은 연탄광의 공간을 분할해서 사용하다 보면 이런 다툼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이야 ‘그때 왜 그리들 억척을 부렸을까’ 생각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심성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핍진한 시대 상황에 내몰린, 그저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연탄을 못 구한 서민들의 원성이 거세지자, 당시의 동력자원부와 내무부에서는 연탄수급대책을 놓고 골몰했고, 전국의 연탄 생산량을 지역별로 골고루 배분하기 위한 방책을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연탄 출하증 제도’였다. 다시 김용덕 사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경기도를 예로 들면 가령 화성군 인구가 몇 명이니까 그 수에 맞춰서 전체적으로 공급물량을 정해주고, 용인군도 주민 수에 비례해서 대략적인 물량을 정해주지요. 그러면 군에서는 다시 면(面)이나 동(洞)별로 할당을 하고, 읍면동 사무소에서는 관내의 판매소별로 물량을 배정해요. 그럼 이제 판매소의 소매상들은 시청이나 군청에 가서 ‘연탄 출하증’을 미리 발급받은 다음에, 그걸 가지고 공장에 가서 연탄을 받아다 파는 거지요.”

공식 판매소가 아닌 주택가 구멍가게에서는, 비공식 루트로 들여온 소량의 연탄에다 새끼줄 손잡이를 꿰어서는 웃돈을 조금 붙여서 낱장으로 팔았는데, 하루 벌이 막노동꾼이나 가난한 자취생들이 고객이었다.

그렇게들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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