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㉔] 봄을 팔고 있는 시장, 장흥 오일장

  • 입력 2023.03.19 18:00
  • 기자명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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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시장을 중심으로 매주 서는 장흥 정남진 토요시장의 전경.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부엌 앞 장독대 항아리 밑으로 손톱만한 크기의 어린 쑥들이 올라왔다. 쑥국을 끓이거나 쑥떡을 해먹으면 좋겠다. 하지만 북쪽 지리산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은 인내심을 가지고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올라온 쑥을 보고 반기는 것은 어쩌면 긴 겨울을 견디며 기다리던 봄을 만난 것 같은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래서 봄을 만나러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히나 바다를 끼고 있는 곳으로.

서울의 정남쪽에 있다고 하여 정남진이라 불리는 장흥의 오일장을 만나러 나섰다. 들이 넓고 산도 좋은데 바다도 면하고 있는 곳이라 물산도 풍부하다. 대나무 말고는 초록이 귀한 곳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눈으로 보는 풍경은 완전히 다른 나라 같다. 벌써 매화꽃이 피어 눈이 부시고 벌판은 푸른빛으로 덮여있다.

장흥은 상설시장이 서는 곳을 중심으로 매주 서는 토요시장과 2일과 7일마다 서는 오일장이 따로 또는 겹치면서 서는 곳이다. 장이 서는 규모로 보면 관광객의 방문이 제법 많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관광객이 몰리는 주말에 힘을 주어 시장은 전체적으로 토요시장으로 포장되어 있다. 지자체의 입장에서나 생산자와 판매자의 입장에서 보면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사람들과 소비자로 만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오일장 초입부터 오감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여느 오일장들과는 다르다. 봄이 일찍 오는 곳인데다 바다에 면하고 있으니 들이 내놓는 초록과 바다 산물의 푸름이 어울려 풋풋하고 비릿하기 그지없다. 새벽에 출발해 도착한 사람들의 허기를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또 있다. 오일장을 둘러싸고 있는 장흥삼합이라 유혹하는 간판들이 너무 현란하여 빨려들어가듯 식당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도 그럴 뻔했다.

아침부터 고기를 구울 수 없으니 국밥을 한 그릇씩 먹고 나와 튀김으로 상을 받았다는 매대에 잠시 머물러 김말이를 하나씩 사서 입에 물었다. 튀김을 파시는 남자분이 풍기는 기름 냄새를 이겨먹는 향수냄새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러다 앗차! 하고 다시 오일장 초입으로 간다. 장흥에 도착해 처음 만났던 어린 머위순을 파시는 분께로 향해 달리는 것이다. 어쩐지 불안하다. 튀김을 사먹으며 노닥거릴 일이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가 든다. 잎은 500원 동전 크기에 줄기 밑동의 붉은색이 저절로 손이 가게 하는 머위였는데 아침밥 먹고 다시 가겠다며 자리를 뜨다니. 아뿔사 없다. 머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없다. 잠시 그 자리를 착각하고 다른 곳을 헤매고 있나 하여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없다. 물건이 너무 좋으니 아마도 식당을 하는 누군가 한꺼번에 사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기분좋게 일찍 자리를 털고 돌아갔을 것이다.

세상사 다 그런 것이다. 기회는 오고 또 오는 것이 아니니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다른 장에서는 가끔 짐이 되니 사놓고 나중에 찾아가겠다고도 했는데 오늘은 너무 이른 시간이었고 제법 많은 양을 가지고 계시길래 방심했더랬다. 살면서 나에게 온 기회를 알고도 놓치고 모르고도 놓치고를 얼마나 많이 반복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눈에서 삼삼하게 아른거리며 나를 괴롭히는 머위를 기어이 사겠다는 일념으로 잘 구획된 도시의 도로 같은 오일장을 꼼꼼하게 둘러보다 대략 비슷한 머위를 샀다. 겨울을 이기고 나온 어린 홍갓을 한 봉지, 이름도 겨울초인 어린 유채도 한 봉지 사서 들었으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길이가 짧은 노지에서 자란 쑥도 한 바구니 샀다. 달래도 사고 이것저것 자꾸 사서 지갑이 가벼워진 만큼 장바구니가 무거워졌지만 같은 실수를 안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들고 다닌다.

머위 산 덕분에 편해진 속으로 미음자형 건물 안의 넓은 마당을 빼곡하게 자리한 해산물장으로 들어간다. 곱은 손으로 까서 파는 바지락살을 조금 사고 굴도 사가라는 눈빛을 거부하지 못해 굴도 좀 샀다. 물 좋은 쏨뱅이도 몇 마리 샀다. 굽거나 튀기면 맛있는 생선인데 가격이 저렴하여 된장 풀고 쑥국을 끓여보려고 한다. 감태지 좋아해서 감태 한 다발 사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머위 사러 갈 때처럼 바빠진다.

돌아가면 장흥의 산물들로 얼마 후 온통 세상을 뒤덮을 초록들의 예고편 같은 밥상을 차릴 수 있을 것이라 마구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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