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쓸모있는 잡초처럼

  • 입력 2023.03.19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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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우리 몸에 이로운 것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엉겅퀴, 쑥, 냉이, 질경이, 달맞이꽃 등은 산과 들에 자생하는 흔한 풀이지만, 예로부터 약성이 있어 우리를 지켜온 식물이다. 그중에 쇠무릎이라는 풀도 있다. 한자로는 소 우(牛)와 무릎 슬(膝)로 우슬이라 한다. 줄기의 마디가 타원형으로 툭 불거져 소 무릎과 닮은 모양새일 뿐더러, 그 효능이 하체 관절에 좋다기에 유래된 이름이다. 전국의 들판이나 논둑에 자생하는 다년생 잡초이지만, 필자는 씨앗을 받아 밭에 작물로 재배한다. 옛 선조들은 무리한 노동 후에 우슬을 먹어 왔고, 자기 몸을 도구 삼아 일하는 여성농민들도 논밭에서 쉽게 눈에 띄는 우슬을 챙겨 먹으며 이만큼 버텨왔지 싶다.

여성농민은 슈퍼우먼이라는 환상과 희생을 강요받으며 골병을 온몸으로 떠안았다. ‘골병(骨病)’은 ‘뼛속까지 깊이 든 병’을 이른다. 오랜 기간 각자 끙끙 앓던 문제는 여성농민의 건강권을 지켜야 한다는 싸움으로 드디어 작년에 여성농민 특수건강검진 근골격계 질환을 산재로 인정받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올해 예산이 시범사업 수준에서 확장되지 못했고, 역시 한정된 지역에서만 진행되는 등 한계가 남았다.

사실 농민 건강에 대한 사회 안전망도 요원하지만, 여기에 더해 여성농민이 아픈 까닭은 부양가족의 돌봄 노동을 대부분 홀로 수행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살림을 일구는 공동체가 못 된다. 여성농민은 밭일을 마치고 집에서 허리를 펴고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가사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적 불평등의 문제다. 여성농민이 아파서 모든 일을 멈추기에 앞서 노동을 분담하고, 건강 검진을 통해 초기에 예방 치료를 받는 게 모두에게 유익할 터인데 말이다.

나름대로 노동 시간과 강도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고민하던 작년에 우연히 듣게 된 한 스마트 농업인의 말에 따르면 이제 농업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했다. 컴퓨터로 날씨와 작물 생장 현황을 모니터링하여 온습도를 조절하고, 양액을 배합하여서 주입한다고 했다. 로봇이 농작물을 수확, 운반한다고 했다. 손에 흙 묻히고, 근육 뭉치도록 땀 흘리지 않고, 하늘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은 불편하고 미련한 일처럼 말했다. 농사일이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직업이 아닌, 청년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도록 ‘헤드폰을 끼고 에어컨을 켠 실내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식물을 키우는’ 농부의 이미지로 바꾸면 어떻겠냐고 했다.

내가 천천히 가는 사람이라서 농사를 택했는지, 농사를 택해서 느리게 사는 건지 모르겠지만 스마트해진다는 농업의 변화가 당최 생경했다. 흙을 살리고 땀내나는 일이 농사라고 여겼다. 맨땅에서 시나브로 풀이 자라고, 흙이 포슬포슬해지고, 미생물이 가득해지는 생명의 역동성을 누리는 농부의 보람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값어치가 있었다. 도시 어디에서나 모든 것은 돈이라고 했기에, 애당초 모든 것에서 돈을 빼려고 시작했던 농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도시의 변방인 농촌에서도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 끄트머리는 소외된 자리이지만, 지구상의 여러 생명들과 연결되어 자본주의에서 해방하는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였다. 그러나 역시 기후위기에 근간이 흔들렸다.

어느덧 낮과 밤의 길이가 비슷해졌다. 음양이 균형을 이룬다는 춘분, 벌써 20도를 웃도는 더위에 밭일을 하려니 반팔 옷을 준비한다. 올해는 얼마나 가물고, 더울 것인지 벌써 불안하다. 예상치 못한 긴 장마와 가뭄, 폭염에 노지 농사짓는 일이 점점 쉽지 않다. 결국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스마트하게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야만 안정된 수확을 하여 지속가능한 농가 소득으로 이어지고, 하다못해 씨앗 받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인지 의심한다. 노지에서 버텨보고 싶은 뱃심이 언제까지 유효할까.

얼마 전 함양 토종씨앗모임 등에서 주관하여 ‘기후 위기와 생태공동체 텃밭’을 주제로 올해 첫 강의를 했다. 지역에서 1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생태텃밭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네에 작은 공동체 텃밭을 만들려는 움직임처럼, 실로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내 주변에서부터 사소한 선순환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쪼록 우리 주변에 있는 자원과 사람의 가치를 더해가자, 건투를 빌었다. 이를테면 보잘것없던 토박이 씨앗 한 알이 마을의 먹거리를 지켜왔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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