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그러지 말걸

  • 입력 2023.03.12 18:00
  • 기자명 정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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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화단에 수선화가 잎을 한 뼘이나 내밀어서 꽃망울까지 받들고 있다. 봄이 발치에 와 있다는 기별이다. 두 팔 벌려 환영해야겠지만 썩 달갑지 않다. 오히려 계절의 변화에 몽니를 부리고 싶다. 어쩌라고! 엉거주춤하느라 준비도 못 했는데.

날카로운 솔잎 끝으로 얼굴을 콕콕 찌르는 듯한 바람이 사납게 불던 날, 남편과 둘이 배추를 묶었던 끈을 걷었다. 남편은 내가 걷어가는 속도의 절반도 못 따라오면서도 허리가 아프다고 자주 앉아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농기계 다루는 일을 주로 하는 남편은 온몸을 움직이는 일감에는 젬병이다. 끈에 딸려 온 배추 진 잎 때문에 일의 진척은 더뎠고 무엇보다 손가락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먼저 낫으로 끈을 자르고 걷으니 더 수월했다. 농한기라 바쁜 일정이 없어서 남편과 둘이 일주일 정도 허리 아픔을 견디며 애쓰면 마무리할 수 있겠지만 몇 시간이라도 빨리 처리하고 싶었다. 속 시끄러운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고 다음날은 일꾼 두 명을 불렀다. 남편과 나는 앞에서 끈을 자르고 일꾼들은 끈을 걷었다. 그다음 날은 일꾼 세 명을 불러서 끈을 다 걷었다.

그리고 바퀴 높이가 내 키만큼 한 트랙터로 짓이기며 한 아름이나 되는 배추들을 로타리쳤다. 4,600평의 겨울배추를 폐기 처분했다.

작년에도 배추 수입량은 꾸준히 늘었고 국내 배추 가격 또한 꾸준하게 하락을 거듭했다. 신문과 TV에서는 과잉생산을 한 농민들의 안일함을 아쉬워했다. 안타까운 농민들을 위해 국민들에게 소비를 촉구한다며 시답지 않은 동정도 양념으로 주절거렸다. 수입 농산물 때문에 어떤 작물도 과잉 아닌 것이 없고 무사한 작물이 없다는 사실은, 절대 알리지 않았다.

배추를 심기 전에 남편은 트럭으로 30대 분량의 퇴비를 주문했다. 나는 놀라서 입이 벌어졌지만 허튼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밭에 투자하겠다는데 어쩌겠냐 싶었다.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하지 말걸 그랬다. 너무 많다고 제동을 걸었어야 했다.

배추를 심은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벌레가 싹둑 잘라 먹은 곳에 배추를 다시 심느라 일주일 넘게 배추밭을 눈으로 훑으며 걸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헛지랄했다. 생일날 편의점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아들한테 김치라도 담아서 보낼 것을.

비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는 내내 가물더니 스프링클러 돌려서 흙을 젹셔 놓은 후에 많은 비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배추밭 고랑에 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밭이 구조적으로 깊은 곳이라 어쩔 수 없다는 남편을 쥐잡듯 몰아세우며 그냥 놔두면 배추가 무사하겠냐고 어떻게든 물을 빼줘야 한다고 악을 바락바락 썼다. 농번기라고 농사일을 거들어주려고 휴가 내서 집에 온 아들이 옆에 있는 자리에서 그랬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헝클어진 부모의 모습을 본 아들의 기분은 어땠을지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명품 가방을 욕심낼 필요는 없더라도 식물에 좋은 영양제만큼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비싼 영양제를 배추에 뿌렸다. 회색의 입자 하나하나가 배춧잎에 축복을 내려주기를 기대했다. 한 봉지에 7만원인데 물 20리터에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4,600평의 배추에 뿌렸으니 100만원 넘는 비용을 추가해서 쓰레기로 버린 셈이다. 명절에 봤던 아들의 운동화가 자꾸 어른거린다. 바닥이 닳아서 물이 들어올 것 같았는데 비 오는 날이 없기를 바라야 할는지.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사이토 고헤이)>를 읽으면서 가능성을 보긴 했다. 자본주의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농민으로의 내 삶은 앞으로도 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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