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벽

  • 입력 2023.03.12 18:00
  • 수정 2023.03.24 14:15
  • 기자명 장수지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

 

윤석열정부가 내놓은, 말도 안 되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과 ‘주당 최대 69시간 노동’을 골자로 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 등은 ‘소통’을 앞세워 집무실을 옮긴 대통령 자신의 발언이 무색하게 정부와 국민 사이의 벽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다. 이권을 가진 이들이 갖게 될 이익과 이권만을 우선 따진 뒤 일단 질러버리고 추후 당사자 의견을 취합하겠다는 식의 말 안 되는 행보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아무래도 대선 전 소통을 중시한 대통령은 대선 후 철옹성 같은 집무실 벽에 갇혀 국민적 공분이 날마다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지난 7일에는 풀리지 않는 갑갑함을 뒤로 한 채 전남 고흥 금산면의 햇양파 수확 현장을 다녀왔다. 2년 동안 계속된 가격 폭락에 당시 밭을 갈아엎을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을 다시 만나 올해 작황을 물으며 현장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예상과 달리 올해 평년 수준을 회복한 가격에도 농민들은 쉽게 밝은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연속된 가격 하락의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으로의 가격 전망이 마냥 밝다고 예견하기 어려워서다. 햇양파 수확이 시작된 현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산 양파가 수입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흘러들고 있다. 농민들이 걱정을 금치 못하는 이유다.

현장의 농민들은 정부가 수급조절에 진심으로 다가서질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매년 폭락과 폭등을 계속하고 있는 사실을 뒤로 한 채 오로지 소비자 물가에만 전전긍긍하며 급급하게 내놓는 단기 대책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현장에선 장기적 관점의 대책을 정부에 요구하기 위해 작물 재배를 한 해 정도 중단해보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일고 있었다. 농민들의 상황이 얼마나 벼랑 끝에 내몰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연속된 가격 하락에 품목별로 폭등한 생산비가 더해져 말 그대로 빚더미를 떠안은 오늘날의 농민들에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윤석열정부는 여타 다른 정부와 마찬가지로 농업계에 무심한 태도를 지속하고 있다. 허나 최근의 행보를 살펴보면 정부의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다행이라 느껴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외치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 중이다. 하지만 유례없이 최대 낙폭으로 떨어진 쌀값은 차치하고 소비자 물가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농산물 가격만을 잡고 또 잡아 내리려는 정부에 농민들과 농업계는 더이상 분노할 여력조차 남지 않을 만큼 지친 것도 같다.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싼 벽이 아무리 견고하다 할지라도 몇 년 전 촛불로 증명해 보였듯 그 벽 또한 단단한 국민들의 의지로 쉽게 깨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