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㉓] 속 불편했던 시장, 예산 오일장

  • 입력 2023.02.19 18:00
  • 기자명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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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났지만 폭설이 내린 날 이른 새벽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예산까지 갔었다. 눈을 핑계로 뒤로 미루고도 싶었지만 이번 오일장 투어도 도착하기 전까지의 설렘과 기대감은 까짓 눈쯤 이기고도 남았다. 아직 제설작업을 시작도 안 한 도로를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운전해 매 5, 10일마다 서는 예산장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설렘과 기대는 딱 거기까지였다. 드넓은 주차장 근처 여기저기에 ‘백종원거리’라 매달린 간판들이 나의 뜨겁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부분의 오일장들은 상설시장 안과 시장을 둘러싼 골목과 거리 주변으로 서지만 예산장은 달랐다. 상설시장 안은 더본코리아의 정육점과 불판대여업체, 국수집, 양조장 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멀리서 달려온 관광객들이 서는 줄과 고기 굽는 연기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같이 갔던 동료가 그 광경을 보면서 모양과 장소만 다른 백종원의 ‘새마을식당’이 연상된다고 했다.

시장바구니 없이 휴대폰만 들고 온 먹방객들의 줄 선 허리 아래로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신 할머니들의 점심이 나를 정말로 우울하게 만들었다.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 없이 드시는 찬 김밥 한 줄, 비닐봉지에 담긴 국수를 떠 드시는 모습을 외면하고 줄을 선 백종원의 음식에 열광하는 사람들. 어쩌면 나조차도 외면하고 싶어지는 그런 현실 앞에 누구도 탓할 수 없고, 그 누구를 탓할 생각이 없지만 우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 음식들이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차마 거기 줄을 설 수는 없었다.

예산은 국밥과 국수가 유명하다. 첫 끼를 먹은 국밥집 국물의 감칠맛이 입에 쩍쩍 달라붙게 달아서 계속 먹을 수 없었다. 부득이 국수집으로 발을 옮겼고 국수집 국물도 국밥집 국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빔국수가 가진 극강의 달고 신맛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산을 좋아하고 사진을 잘 찍으시는 분의 가게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좀 차렸다.

예산은 쪽파로 유명한 곳이다. 눈은 왔으나 입춘이 지났으니 딱히 겨울이랄 수도 없는 날들이라 말라비틀어진 잎들을 헤쳐 나온 쪽파의 움들이 보였다. 당연히 쪽파를 사야 했다. 정말 탐나는 냉이와 지천인 달래들이 내 장바구니에 담겼고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하는 새조개도 좀 샀다. 그러다 어린 가오리인 간자미를 한 마리 사고 콩물을 뽑지 않은 비지를 띄워 만든 청국장을 좀 샀다.

 

쪽파와 달래, 냉이 등을 들고 나와 팔던 좌판 상인.

 

'백종원거리'라 쓰인 커다란 입간판을 배경으로 좌판을 차린 한 할머니가 고추장과 비지를 팔고 있다.

 

여러 오일장을 다녔지만 그렇게 띄운 청국장은 처음 보았고 콩알만큼 떼어 먹어보니 제대로 된 청국장의 냄새도 나고 급하게 시장기가 느껴질 만큼 맛도 괜찮았다. 강원도에서 보던 ‘고작비지(띄운 비지)’와 많이 비슷해서 더 좋았다. 건더기가 잔뜩 느껴지는 시큼한 보리고추장도 있고 재래된장과 쩜장이라 이름 붙여진 막장도 있었다. 자꾸 먹여보면서 굉장히 어려운 공정으로 만든 것이니 사가라고 하셨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리를 떴다.

예산 오일장 주변엔 다른 곳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국수집이 적어도 다섯 곳은 있었다. 국수를 조리해 파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소면이나 중면, 혹은 칼국수면을 뽑아 말려 파는 제조업체들이다. 어릴 때 뽑아 말리는 국수 가닥을 오가면서 주인 몰래 잘라 먹던 국수집들이 대를 이어가며 아직도 있는 곳이라 좋았다. 그냥 올 수 없는 일이다. 그냥 밀국수도 사고 단호박과 시금치의 색을 입힌 국수도 좀 샀다. 다음 수업에 있을 딸기국수에 써야겠다.

 

 

콩나물콩이 아닌 메주콩으로 기른 머리 큰 콩나물을 샀다. 콩나물을 파는 상인은 다른 지역이나 마트에는 없는 예산만의 특산품이라고 특허까지 낸 것이라 하셨다. 그 특허의 비밀이 뭐냐고 여쭈니 메주콩이라고 하셔서 한바탕 웃었다.

돌아오는 길엔 가라앉았던 마음이 좀 풀렸는데 생각해보니 달래를 팔던 분의 온기 덕인 것 같았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가는 길에 들러 사가겠다고 했었는데 다시 가니 일어나 나를 안아주고 덕담도 해주셨다. 다시 오겠다고 하지만 다시 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정말 고맙다고 하셨다. 사는 게 이런 거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오일에 한 번 만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평생 한 번 보고 안 보는 사람들일지라도 약속은 지키고 작은 고마움에 기꺼이 안아주는 거지. 그게 인생이지. 큰 교훈을 얻었으니 되었지 뭐.

 

예산오일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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