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입춘이 지나고

  • 입력 2023.02.12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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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이번 겨울은 한파와 쌓인 눈을 여러 차례 만났다. 장독대의 장독마다 백설기 같은 눈을 한 뼘 넘게 이고 있다. 그 옆에 무명 솜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듯한 애기동백꽃이 앙증맞다. 핸드폰으로 찰칵! 색이 바래거나 찢어지고 구멍 난 곳들을 가려서 화장하듯 온통 하얀 눈으로 덧씌워 놓은 풍광, 이쁘네! 는 잠깐이고 불편한 수고는 길어진다. 조만간 배달될 난방비고지서까지 눈에 어른거려 금세 움츠려진다.

라디오를 틀어 놓은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눈을 쓸었다. 쌓인 눈으로 비닐하우스가 폭삭 내려앉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이고! 내가 눈에 파묻힌 애기동백꽃을 핸드폰에 담고 있을 때 어느 농민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농민이라고 한다. 피해를 감당하고 비닐하우스를 복구하려면 기운이 많이 모자랄 텐데….

어느 때부터인지 TV나 신문을 볼 때 사람 나이에 시선이 몰렸다. 내 나이보다 훨씬 적네, 나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사람이네, 저 나이가 되면 내 모습도 비슷할까? 하면서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을 어림짐작하며 이질감이나 동질감을 확인한다. 내게도 주어졌던 같은 시간을 다르게 활용하면서 만들어낸 성과물도 견주어 본다.

특히 연말에 TV를 보면 같은 시대에서 다른 세상을 구경하게 된다. 가수나 배우들의 시상식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데뷔 30년 차 원로 배우라고 또는 가수라고 그의 외길 인생에 대한 칭송으로 한참 동안 열렬한 박수가 이어진다. 또 어떤 가수는 경륜이 짧지만 대중들의 인기를 얻어 국민 가수라는 별칭까지 받았단다. 탁월한 재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영예려니 한다. 노력이나 재능에 따라 계층 상승이 가능한 직업이기도 하다.

가방끈이 긴 사람들, 의사 교사 변호사 같은 사람들의 30년 경력은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노후는 물론이거니와 자식들의 앞길까지 매끄럽게 다져놨으리라. 남편 친구는 교사직으로 정년퇴임 후 취미로 기타를 배우기도 하고 수시로 부부가 함께 여행을 다닌단다. 고정적인 연금이 노후를 짱짱하게 받쳐준다.

기능직 경력 30년이면 노동 단가가 높다. 돈 자랑은 못 해도 노후는 안정적이다. 농사 30년의 내 경력의 결과물은 실로 보잘것없다. 앞으로 20년이 보태진다고 해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우리나라 밭작물에서 마늘만 빼고 여러 가지 작물을 지어봤지만 농산물 가격을 흡족하게 받았던 기억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봐도 손가락이 남는다.

“엄마 아빠는 왜 농사를 지어서 주말에도 우리를 집에 처박아 두냐!”고 초등학생이던 작은아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옆집에 교사 부부가 살았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마다 놀러 다니면서 우리 아이들을 끼워주곤 했다. 같이 어울려 놀러 갔다 올 때마다 작은아들이 툴툴거렸다. 주말에 같이 놀아주는 부모를 둔 옆집 친구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니 나이에 나는 보리쌀 씻어 안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었다 이놈아!”라는 말 대신 미안하다고만 했었다.

현재의 농업은 자본과 노동이 만만치 않게 투여된다. 투자한 자본은 회수되지 못하고 버려야 할 폐농자재만 덩그러니 남고 과도한 노동으로 근골격계질환, 전문용어(?)로 골병을 수확한다. 아래는 보지 않고 위만 올려다보며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불행을 자초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한 분야에서만 애쓴 30년 이력이라면 자긍심을 가질 만한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최소한, 한 해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 입춘이 지난 시기에, 지난해에 지은 농산물을 팔지 못해서 전전긍긍하지 않는 건전한 나라에서 농사짓고 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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