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한 줄의 문장, 한 줌의 씨앗

  • 입력 2023.02.12 18:00
  • 기자명 이희수(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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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경북 봉화)
이희수(경북 봉화)

“제 목소리 들리세요?” 이 짧은 문장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집이나 일터, 그 어디서든 수도 없이 했던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일상어가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절창(絶唱)이 될 때가 있다.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중략)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2003년 10월 22일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했던 말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듣는, 주옥같은 말들을 간직한 시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가 넘쳐난다. 이 작품들을 모두 한 곳에 쌓아두고, 엄청난 압력으로 압축하여 하나의 문장을 만든다면, 다른 모든 문장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더라도 정은임 아나운서가 말했던 저 마지막 문장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한 빛을 반짝이며 제 모습 그대로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을까? “제 목소리 들리세요?”라는 단 한 줄의 말로 시대의 근심과 아픔을 환기하고, ‘세상에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 하루를 힘겹게 버티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연대의 마음을 전하는 저 거룩한 문장의 힘은 말하는 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입춘이 지났다. 입춘이 지나면 들에 뿌릴 씨앗을 고르는 농부의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예전부터 있었던 가뭄·장마·태풍·폭염·한파는 점점 가혹해지고, 가격은 수시로 폭락하는데, 숱한 장애물들을 운 좋게 피해 갈 씨앗을 고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강인한 육체와 선량한 영혼을 지닌 농부들이 가난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농부가 어떤 씨앗을 선택하든 먼저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농부가 씨앗을 뿌려서 가꾸고 거두는 농사의 과정도 결국은 “제 목소리 들리세요?”라는 절실한 문장을 완성하는 과정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벅찬 소망도 품어 본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집>이라는 시에서 ‘밀은 공기와 햇빛과 괭이로 된’ 것이며, 빵은 ‘신의 얼굴’이라고 아이에게 타이르듯 이야기한다.

시인의 바람처럼 농부가 뿌린 씨앗이 공기와 햇빛을 만나고 여기에 노동이 더해져 생산된 농산물이 어느 가난한 가정의 식탁에 ‘신의 얼굴’로 놓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이를 위해 농부가 통과해야 할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미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농촌은 외부 노동력이 없으면 동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농사일을 대신해줄 인력은 부족하니 인건비 상승은 필연인데, 각종 농자재도 덩달아 오른다. 여기에 더하여 어렵게 생산된 농산물은 유통과정에서 이런 저런 명목으로 뜯기고 나면 생산과정에서 이미 투입된 농비를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씨앗을 뿌리는 늙은 농부의 뒷모습은 슬픔을 넘어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올해 86세인 아버지는 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미 여러 날 전에 고추 모종생산에 착수했다. 다른 농사보다도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고, 필연적으로 요통이 수반되기에 풋고추만 봐도 허리가 아파오는 나로서는 고추농사만은 피하고 싶지만, “내가 이제 농사를 지으면 몇 해를 더 짓겠나, 올해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번에도 꺾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뿌려진 씨앗이니 정성을 다해 가꾸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 줄의 문장이 세상에 뿌리는 씨앗이 되고, 한 줌의 씨앗이 세상의 고단한 삶들이 모여 앉은 식탁에 전해지는 위로와 격려의 문장이 된다면, 농부의 삶에 이보다 더한 보람과 영광은 다시 없을 것이다. 지난 2년간 부족한 글에 발언권을 준 신문사와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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