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파독 간호사·광부⑧ 간호사와 광부가 토대를 만든 독일 한인사회

  • 입력 2023.02.05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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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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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에 독일에 파견되었던 간호사와 광산노동자들이 애당초 약정한 근로계약 기간은 3년이었다. 하지만 계약이 만료됐다 해서 미련 없이 짐을 챙겨 귀국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드물었다. 어떻게든 체류 기간을 연장하려고 궁리를 했다.

파독(派獨) 시기별로 독일당국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정책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광부들에게 엄격했던 것과는 달리 간호사들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의 연장 신청을 받아주기도 했다. 1973년에 출국하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의 한 광산에 투입됐던 김원우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우리가 갔을 때는 계약 기간 연장을 안 해줬어요. 한국인 동료 50명이 같은 광산에 배치돼서 일했는데 나를 포함해서 4명만 현지에 남고, 나머지 46명은 3년 만기가 되자 어쩔 수 없이 귀국행 비행기를 탔지요. 내가 독일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체류 기간이 남아 있었던 한국인 간호사와 결혼을 한 덕분이에요. 독일의 법률은 부부에게 함께 살 권리를 보장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아내의 체류 기간마저 만료되자 출국하라는 압박이 막 들어와요. 그러는 중에 마침 아이가 태어나니까 5년을 연장해 주더라고요. 이후로 어렵지 않게 영주권을 받았고…하지만 시민권은 안 받겠다고 사양했어요. 내 나라 국적을 버릴 수가 없으니까.”

광산노동자들이 주말 휴무일이면 한껏 차려입고서, 한국인 간호사들이 기거하는 시립병원의 기숙사 입구로 삼삼오오 몰려가서 데이트 신청에 열을 올렸던 배경에는 사랑, 동포애 뭐 그런 것 말고도 독일 현지에 더 머무를 방편을 찾고자 하는 계산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리라.

한편 1966년도에 뒤셀도르프시립병원에 배치되었던 하영순 씨는, 63명의 간호사가 그녀와 함께 독일로 갔다가 그중에서 6명만 3년 후에 귀국하고, 6명은 현지에 남았으며, 그 외에는 모두 제3국으로 갔다고 증언한다.

“기간이 만료된 간호사들이 경쟁적으로 미국 대사관에 취업비자를 신청해서 미국의 대형병원으로 취업해 나갔지요. 캐나다로도 많이 갔고요.”

그러나 하영순 씨 일행은 한독(韓獨) 양국이 공적인 협정을 바탕으로 간호 인력의 집단취업을 추진하기 이전에 민간레벨에서 주선하여 독일에 갔던, 그야말로 초창기의 경우다.

그보다 4년 뒤인 1970년에 베를린시립병원에 취업했던 김순복 씨는 독일인을 남편으로 맞았다. 그와 함께 갔던 간호사들 중 20%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소수의 인원만 제3국으로 갔으며, 나머지는 독일에 남았다. 남은 사람들 중에서 3분의 1은 한국인 광부와 결혼을 했고, 3분의 2는 독일 현지인 남자를 배우자로 삼았다. 김순복 씨의 설명이 그러하다.

당시 광부로 파견됐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대학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국내 탄광에 잠깐 적을 두는 방식으로 경력을 꾸며서 독일행 비행기를 탄 사람들이다.

“광부 출신 남자들 중 상당수는 이곳 독일에서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학위도 따고, 졸업 후에 의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사업을 하기도 하고…. 게다가 우리 한국인의 교육열은 알아주잖아요. 2세들이 독일 주류사회의 각 분야에 진출해서 그야말로 우리 교민사회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어요. 얼마나 자랑스러운데요.”

그렇다면 독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사랑의 언약’을 했었다는, 간호사 김순복과 대학생 애인은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독일에 오고 나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연애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그런데 시일이 지날수록 곰곰 생각을 해보니 귀국하기는 어렵겠더라고요. 마침 같은 병원에 학비를 벌기 위해 남자 간호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롤프(Rolf)라는 의학도를 만나서 마음이 통했고…결국 결혼을 했지요. 남편은 이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보건소 소장이 되었어요. 그런데 한국 애인과 주고받았던 편지는 차마 못 버리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가지고 있어요. 여든 살쯤 되면, 간호사 시절을 되뇌면서 한 번 꺼내서 읽어 보려고요.”

광산노동자 파견은 1980년까지 이어졌으나, 간호 인력 파견사업은 독일 정부의 정책변경으로 1976년에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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