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소외시킨 정치, 선거제 개혁으로 판 바꿔야

  • 입력 2023.02.05 18:00
  • 기자명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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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수 대표. 변호사 및 공인회계사. 199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현재는 농촌·농업·농민을 옹호하는 공익법률단체인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예산감시운동 단체인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승수 대표. 변호사 및 공인회계사. 199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현재는 농촌·농업·농민을 옹호하는 공익법률단체인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예산감시운동 단체인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예전에 TV에서 북유럽 국회의원들의 생활을 다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국회의원 중에는 농민 국회의원도 있었다. 그는 주중에는 국회의사당에서 직접 법안을 검토하고 회의를 하는 등 매우 성실하게 의정활동을 하고, 주말에는 자신의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개인 보좌진도 없고 다른 사람이 운전해주는 차량도 없이 의정활동을 하고 있었다.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바꾸려면?

이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대한민국 국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국회에서 열리는 토론회를 가면, 국회의원들이 인사말하고 사진 찍은 후에 자리를 뜬다. 물론 바쁜 일이 있는 날도 있겠지만, 대체로 이런 모습을 보이니 ‘국회에서 토론회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지역구의 경조사까지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법안이나 정책보다 중요한 것이 ‘지역구 관리’가 아닌가 싶다.

물론 모든 국회의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소수의 성실하고 진지한 국회의원들도 있다. 그러나 국회 전체의 모습은 점점 ‘더 나빠져 왔다’는 것이 국회를 아는 사람들의 평가이다. 그렇다면 이런 국회의 모습은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을까?

어느 정치학자가 토론회에서 ‘국회의원을 둘러싼 생태환경이 바로 선거제도’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그 속에서 사는 국회의원들의 행태가 바뀐다는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물갈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선거 때마다 절반 남짓한 국회의원들이 바뀐다. 현재의 21대 국회에서도 초선의원 비율이 50.3%에 달했다. 그런데도 국회의 모습은 나아지지 않는다. 사람을 바꿔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선거제도를 바꿔서,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선거제도 개혁은 지금처럼 기득권을 가진 쪽이 유리한 것이 아니라, 정책이 중요한 선거가 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농민들과 농촌주민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선거제 개혁 원칙 제시 기자회견’에서 692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활동하고 있는 2024정치개혁공동행동 대표자들이 “비례성이 실현되는 선거제 개혁안, 시민과 함께 마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선거제도 개혁은 지금처럼 기득권을 가진 쪽이 유리한 것이 아니라, 정책이 중요한 선거가 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농민들과 농촌주민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선거제 개혁 원칙 제시 기자회견’에서 692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활동하고 있는 2024정치개혁공동행동 대표자들이 “비례성이 실현되는 선거제 개혁안, 시민과 함께 마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승자독식+지역주의가 낳은 기득권 구조

그렇다면 지금 선거제도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첫째는 거대양당의 기득권 구조가 강화되고, 대량의 사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의원 300명 중에서 253명을 소선거구제(1등만 당선되는 선거제도)로 뽑는다. 나머지 후보를 찍은 표는 사표가 된다.

이런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는 거대양당 중심의 정치구조를 만들었다. 거대양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지역구에서 당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비례대표 의석은 너무 적다. 그러니 다양한 정당들이 국회에 진입할 수가 없다. 지금의 농업·농촌 현실을 생각하면, 농민당이나 농촌주민당이라도 만들어야 할 형편이지만 그런 정당을 만들어도 국회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성, 청년들의 국회 진입도 어렵다. 돈, 스펙, 연줄, 인지도 등이 부족한 사람들은 거대정당의 공천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19%, 20·30대 의원 비율은 4.3%에 불과하다.

둘째,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는 영·호남 등에서 지역 일당 지배체제를 낳았다. 1등만 당선되는 선거방식이니, 특정 거대정당이 국회의원부터 지방의회까지 모두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천이 곧 당선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공천을 받기 위해 줄서기, 상대편 음해 등 온갖 부정적인 행태가 나타나게 된다.

농민, 농촌주민을 소외시키는 정치

농민과 농촌주민들 입장에서도 선거제도 개혁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의 한국정치에서 농민과 농촌주민들은 정치적으로 대변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농민 출신 국회의원을 ‘하늘의 별따기’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금의 선거제도에서 농민이 국회의원이 되려면 거대정당에서 유리한 지역구에 공천을 받거나, 당선 가능한 비례대표 순번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농사짓는 농민에게 돈, 스펙, 줄 서는 기술, 높은 인지도가 있기는 어렵다. 농촌주민도 마찬가지이다. 농촌을 포함한 지역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도 실제로 농촌마을에 거주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농촌이 겪고 있는 심각한 인구감소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국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농촌 지역에서 의료, 교육, 주거, 복지, 환경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필요한데, 그에 관한 논의도 없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지를 보전하고 농업을 지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절실한 과제인데, 그에 대한 인식도 없다. 농촌 지역 곳곳에서 일어나는 난개발과 환경오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농민들과 농촌주민들 입장에서도 선거제도 개혁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농민들과 농촌주민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정당도 필요하고 국회의원들도 필요하다. 꼭 새로운 정당이 생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표가 없어지고, 농민들과 농촌주민들의 표도 중요할 정도로 치열한 ‘정치적 경쟁구조’가 생기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처럼 기득권을 가진 쪽이 유리한 것이 아니라, 정책이 중요한 선거가 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야 농민들과 농촌주민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유력한 대안

이런 거대정당 중심의 기득권 구조를 깰 수 있는 선거제도는 무엇일까? 연초에 윤석열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를 얘기했지만, ‘중선거구제’와 ‘대선거구제’는 다른 것이다. ‘중선거구제’는 1개 선거구에서 2등, 3등, 4등까지 당선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기초지방의원을 이런 방식으로 뽑고 있다. 그러나 기초지방의회까지도 거대양당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선거구역이 넓어지면서 선거비용만 늘어나고 선거운동도 힘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대선거구제’는 다른 문제이다. 1개 선거구에서 5명 이상을 뽑는 대선거구제는 단순한 지역구 선거 방식으로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대선거구제를 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는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즉 대선거구제는 거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나타난다.

가령 대한민국의 경우, 전국을 몇십 개 권역으로 나눠서 1개 권역당 6~11명 정도를 뽑을 수 있다. 이것은 비례대표제이기 때문에, 그 권역 내에서 각 정당이 얻은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받는다. 가령 1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권역이 있다면 30%를 얻은 정당은 3석을, 10%를 얻은 정당은 1석을 배분받는 것이다. 이렇게 정당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하면, 다양한 정당들이 정책으로 경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농촌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권역에서는 농업, 농촌 문제도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다.

다만 이렇게 대선거구(권역별 비례대표제) 방식으로 선거를 하게 되면, <표의 등가성>이 일정 정도 훼손될 수 있다. 가령 10명을 뽑는 대선거구(권역)에서 1석이라도 확보하려면 10%의 정당 득표를 올려야 한다. 그러면 7%, 8% 얻은 정당도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덴마크, 스웨덴 같은 나라는 일정한 의석을 ‘조정의석’이라는 명목으로 떼 두었다가, 전국 정당 득표율과 의석 비율 간의 차이를 조정해준다. 대선거구(권역)에서 의석을 제대로 못 받은 정당도 일정 득표율 이상을 전국적으로 얻으면 그에 해당하는 의석을 배분해주는 것이다. 이런 선거제도가 덴마크,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된 비결이다.

이 방식은 대한민국에서는 적용하기가 매우 쉽다. 지금 253명의 지역구 의석을 대선거구(권역별 비례대표)로 뽑으면 된다. 전국을 30~40개 정도 권역으로 나눠서 뽑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47명의 비례대표 의석을 조정의석으로 활용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국회의석을 늘리지 않고도 거의 완벽하게 <표의 등가성>을 보장하고 지역 일당 지배체제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유권자들이 가진 ‘비례대표’ 공천에 대한 불신도 해소할 수 있다. 대선거구(권역별 비례대표제)에서는 유권자들이 투표용지에서 정당도 선택하고 후보까지 선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한 정당 안에서 누가 국회의원이 될지도 유권자들이 직접 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개방형 명부’ 방식이라고 한다.

물론 필자가 지금 설명한 방식 외에도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다른 대안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선거제도로는 정치에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 농촌주민들도 선거제도 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새해부터 오랫동안 시민사회운동에 매진해온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의 원고가 격월로 연재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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