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파독 간호사·광부⑦ 광부와 간호사, ‘미팅’을 했다

  • 입력 2023.01.22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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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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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혹은 70년대 초,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州)의 뒤셀도르프 시립병원 안에 있는 기숙사에는 1966년에 파견된 63명의 한국인 간호사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어느 주말 오후, 마침 퇴근 시간이라 근무를 마친 간호사들이 하나 둘 기숙사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들보다 먼저 삼삼오오 몰려와서 기숙사 입구를 지키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인근 광산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었다.

간호사들의 퇴근행렬이 기숙사 앞에 이르자, 어슬렁거리던 광부 사내들의 움직임이 제법 기민하고 용감해진다. 뭐, 그래봐야 그들의 프러포즈는 어쩔 수 없이 신파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이 근처…저쪽에서 일하는데…시간 있으시면 커피숍에 가서 차나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가씨, 잠깐 통성명이나 하십시다.

-우리가 피차 이국땅에서 고생하는데…앞으로 가끔 만나서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아직 한국에, 남녀 간에 ‘내외하는’ 유교예절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까짓것, 수만리 타국 땅인지라 흉볼 사람 없겠다, 더구나 미적거리다간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할 수도 있다는 절실함까지 더해져서, 그들은 고국에는 아직 없는 새로운 ‘미팅문화’를 개척하고 있었다.

-야호! 어이, 친구! 아까 그 아가씨가 내 데이트 신청을 받아줬어! 자넨 딱지 맞았지?

다음 주말에 만날 약속을 받아낸 남자가 좋아 펄쩍 뛰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광부, 하면 고국에서도 썩 환영받는 직종은 아니었잖아요. 더구나 독일에서는 모두가 기피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수입을 해왔던 것이고요. 그래서 간호사들은 그들이 탄광 노동자들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광부 운운하는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어요. 혹 마음 상해 할까봐서요. 우리는 광산에서 일한다고 하면 온몸이 시커멀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기숙사에 데이트 신청하러 온 남자들을 보니 얼굴도 하얗고 차림새도 말끔하더라고요. 때 빼고 광내고 나와서 그런지, 하하.”

그렇게 몇 번 만나서 친해지는 경우, 간호사는 남자를 기숙사로 초대해서 따뜻한 쌀밥을 지어 함께 먹기도 했다고 하영순 씨는 얘기한다. 하영순 간호사의 경우엔 다니던 성당의 한국인 신부로부터 광부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는데, 그 남자가 독일에서 그녀와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현재의 남편이다.

“한국인 광부들 중엔 처자식을 고국에 두고 온 기혼자들도 있었지만, 총각들도 다수가 기혼자인 것으로 서류를 꾸며갖고 왔어요. 가족 수당을 얹어 받으려고요. 그런데 신부님이, 정직하게 ‘총각’ 신분으로 독일에 온 남자 한 사람을 소개해 주면서 믿을 만하다고 해서 만났지요. 그러다 정이 들었고…고려대 출신의 김형구라는 그 광부하고 1970년도에 결혼을 했지요.”

광부든 간호사든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그래서 상당수는 만기가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간호사의 경우엔 3년 연장이 가능했다. 광부와 간호사가 부부를 맺는 경우엔 배우자의 남은 체류 기간만큼 함께 머물 수가 있었다. 하영순 씨의 남편 김형구 씨 역시 부인이 취업 상태였기 때문에 계약기간이 끝나고도 독일에 머물 수 있었는데, 그 사이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여 관련회사에 취직을 했고, 1남 1녀의 자녀를 출산한 후 영주권을 얻었다.

뒤셀도르프와는 달리 베를린 인근에는 광산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 남자를 구경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베를린 시립병원에 근무했던 김순복 씨의 회고다.

-아이고, 모처럼 휴일인데 꽃다운 처녀들이 기숙사 골방에 틀어 박혀서 이게 무슨 청승이냐?

-글쎄 말이야. 한국에서는 어지간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아까운 청춘이로다.

-얘, 김순복, 너는 고국에 두고 온 대학생 애인하고 사흘이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무슨 배부른 소리야?

당시 김순복은 ‘첫사랑의 애인’을 한국에 두고 갔었고, 그녀의 부모도 당연히 3년 계약기간이 끝나고 귀국하면 두 사람이 혼인을 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사랑, 이루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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