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파독 간호사·광부⑥ 일요일에도 석탄을 캤다

  • 입력 2023.01.15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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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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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월 29일에 김포공항을 이륙한 김원우 씨(당시 30세) 일행은 장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쾰른의 본 공항에 착륙하여, 다음 날인 30일 저녁에야 독일 중서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한 탄광촌 기숙사에 도착했다. 함께 비행기를 탔던 전체 인원은 100명이었으나 절반은 다른 지역으로 가고, 나머지 50명이 그곳에 배치된 것이다. 전남 강진 출신의 김원우는 같은 또래의 박완채, 조계석과 기숙사의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그 둘은 모두 우리나라 서남부지역의 유일한 탄광인 화순광업소 출신이었다. 바로 옆방에는 강원도 팀이 들었다.

“이역만리 낯선 곳에 갑작스럽게 날아왔으니, 앞으로 3년 동안 적응하고 살아가려면 주변 지역도 좀 구경하고 차분하게 작업장 환경도 둘러보고 할 여유를 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방 배정을 하고 나서 곧바로 집합을 시키더니 기숙사 생활규칙 설명하고, 작업현장에 가려면 통근버스를 어떻게 타고 가야 하는지 기타 등등을 정신없이 교육시키더라고요. 그래도 하루 이틀 여독을 풀 시간은 주겠지 하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바로 다음 날인 31일 새벽,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기숙사 복도에 울려 퍼졌다. 군대식으로 말하면 기상나팔 소리였다. 김원우 일행은 얼결에 잠을 깼다.

-아니, 어젯밤에 도착했는데…우리 오늘부터 당장 지하 막장으로 출동을 해야 하는 거야?

-설마 오늘부터 채탄작업을 하라고 시키기야 하겠어. 우리는 잠이나 좀 더 자두자구.

“그런데 먼저 와 있던 한국인 광부가 감독관의 말을 통역해주는 걸 들어보니, 빨리 기상해서 밥 먹고 그 날부터 작업출동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독일 놈들 참 독하구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기왕에 돈 벌러 온 것, 하루라도 먼저 시작해서 나쁠 건 없다, 일단 가보자, 그랬지요 뭐.”

드디어 통근버스를 타고 탄광으로 출근했다.

광부들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불과 1분 30초 만에 1,000미터 지하의 채탄작업 현장에 멈췄다. 일부는 거기에 내려서 작업을 하고, 김원우를 비롯한 나머지는 500미터를 더 내려간 현장에 투입되었다. 당시 한국의 탄광과는 달리 채탄과정이 상당 부분 기계화돼 있었고 따라서 조금은 더 안전했지만, 그러나 완벽한 기계화나 완벽한 안전장치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 김원우 씨의 설명이다.

지하 탄광의 모습이야 어디나 별다를 게 없었으나 이역만리에 가족을 두고 떠나온 데다, 사방이 어둠과 석탄더미로 둘러싸인 1,500미터의 지하막장에 자신이 서 있다고 생각할 때면, 엄습해오는 고립감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 그는 당시를 회상한다.

작업이 끝나고 통근버스가 기숙사 입구에 멈추면, 유독 한국인 광부들만 부리나케 달려가는 곳이 있었다. 수위실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통근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선 배가 고프니까 식당으로 몰려가는데, 우리 한국에서 온 광부들은 배고픈 건 둘째 문제고, 경쟁하듯이 수위실을 향해서 달음박질을 해요. 왜 그랬겠어요? 혹시 고향에서 우편물 온 것 없나 그 기대를 갖고 달려가는 거지요. 편지 내용이야 식구들 모두 몸 성히 잘 있다, 보내준 돈은 잘 받았다, 동생 아무개가 대학에 들어갔다, 뭐 그런 내용이지요. 특별한 사연이 아닌데도 그저 반갑고 감격스러워서, 편지지를 펴들고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훌쩍거리기도 하고….”

당시 탄광노동자들의 급여는 실적에 따라 임금을 산정하는 도급제였다. 그래서 유고나 터키에서 온 광부들이 일하기를 꺼리는 휴무일에도, 한국인들은 휴식을 반납하고 작업조에 편성해 달라고 요청을 하곤 했다. 따라서 어떤 달에는 다른 광부들의 배나 되는 임금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 김원우 씨의 설명이다.

파독 광부들에게 가장 우울한 소식은, 독일 내의 다른 탄광에서 일하던 한국인이 사고를 당해서 희생됐다거나, 큰 부상을 입어서 귀국하게 됐다는 등의 소문이었다. 돈벌이를 하겠다고 먼 길 떠나온 같은 처지의 동포로서의 안타까움과, 그런 사고가 언제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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