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어느 소농의 기후정의

  • 입력 2023.01.15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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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어느새 겨울의 마지막 절기인 대한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동지를 전후로 경남 거창 시골 마을은 오랜만에 겨울다웠습니다. 예로부터 농민에게 눈소식은 봄가뭄이나 병충해 시름을 미리 덜어 주기도 했습니다. 펑펑 내린 눈으로 제일 신난 건 동네 아이들이었지요. 학교 운동장에서 손이 시린 줄 모르고 크고 작은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 덕에 저도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눈 구경을 지레 포기해서인지 논밭에 소복이 쌓인 눈 풍경이 더 반갑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같은 땅덩이임에도 전라도는 17년 만에 가장 큰 폭설로 인해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는 등 농가 피해 소식이 들려와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처럼 지구 온난화는 ‘따뜻한 겨울’ 뿐만 아니라, 급격한 추위와 대설 등의 이상기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북극 지방의 온도가 상승하면서 제트 기류의 비이상적인 움직임으로 ‘북극한파’가 남하한 까닭입니다. 문제는 세계 곳곳에서 100년에 한 번 일어날 정도의 자연재해가 매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기후 위기는 단지 기온의 상승만이 아니라 폭염과 폭우, 폭설, 가뭄 등의 극단적인 날씨를 일상적으로 겪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구 공동체원으로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느낌입니다.

기후변화는 모든 사람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지만, 경각심과 위기의식을 느끼는 정도는 천차만별입니다. 미래가 사라졌다는 분노와 절망감으로 ‘기후 우울증’에 빠진 이들부터 기후변화를 가짜 뉴스 취급하며 플라스틱 소비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까지 말입니다.

우리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지 기후 시계가 돌아갑니다. 자연의 법칙에 프로그래밍된 농부의 시간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크게 달라질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바다가 일렁이고, 숲이 푸르르고, 호수가 잔잔하듯 농부는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농부와 하늘의 기운이 어우러지는 농사의 도가 흔들리는 가혹한 현실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마음만큼은 지키고 더욱 키우려 합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후손들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7대 후손’에게 미칠 영향까지 고려한다는 인디언 부족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씨앗과 농지를 대물림하는 여성농민에게도 긴 안목이 있습니다. 수많은 조상님이 뿌리내려온 땅을 일구며 새싹을 틔우는 씨앗의 관점에서 미래 세대를 의식합니다. 농사를 지으며 ‘자연 훼손’이 곧 ‘자기 훼손’이 되는 일체감을 익혀 왔습니다.

실로 밭에서 소득과 직결되는 날씨의 변화에 농사 방식뿐만 아니라 일상 전 영역에 걸쳐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집과 밭에서 지구 온도를 높이는 요인을 찾아 멈추거나 사용 속도를 줄여 나갔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앞에서 어쩌면 부질없는 행위에 불과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에너지가 낭비 없이 순환할 수 있도록 최적화를 애씁니다. 또한 양육자로서 어른도 불안한 미래를 어떻게 자녀와 함께 마주하고 헤쳐나갈지 고민합니다.

초3 아들은 ‘기후행동 실천 달력’을 학교에서 받아왔습니다. ‘내복을 입고 실내 온도는 18도로 해요, 나만의 물병을 갖고 다녀요, 투명 페트병은 분리배출해요, 휴지는 한 장씩 아껴서 써요, 내 주변의 풀과 꽃에 물을 줘요’ 등 매일 실천 여부를 체크하는 달력이었습니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환경 실천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있었습니다.

기후위기의 실마리를 모색하며 ‘농생태학 학교(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주관)’에 참여하여 받았던 교재를 이따금 들춰봅니다. 농생태학은 농민에게서 나온 기술이자 철학입니다. 전통적인 소농의 방식으로 다양한 품종의 토종씨앗을 재배함으로써 농업 생태계의 탄력성을 높여 기후변화의 위험을 낮추는 실천입니다. 어쩌면 기후행동 아이디어는 이미 여성농민들 손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기후 위기에 대한 부채 의식과 생존 전략으로 다양한 품종이 어우러지는 퍼머컬처 농장 디자인을 새해 목표로 삼았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걸리는 작은 실천 과정이 될 것입니다. 계획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구에게 더욱 다정한 한 해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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