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뒤늦은 박수를

  • 입력 2023.01.08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새해 아침에 해 뜨는 광경을 보러 바닷가로 갔다. 어둑한 지평선에 서광이 비치다가 쨍! 하고 해가 떠오르기를 기대했다. 그래야 올해의 기운도 밝게 펼쳐질 것 같아서. 일출 시간은 7시 37분이라는데 8시 20분이 되어서야 바다 위에 해가 달처럼 나타났다.

해가 바뀌었지만 어제의 다음 날일 뿐이다. 정서적으로는 아직 어제에 머물러 있는 것 같고. 게다가 팔지 못한 겨울배추와 대파가 밭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다. 주변 환경이 엄동설한의 동지섣달이다.

대파와 겨울배추가 주 작목인 이곳은 김장까지 마치고 나면 농한기다. 자식들은 커서 객지에 나가 있으니, 일 다 하고 죽은 무덤 없다고 작정하면 맘껏 늦잠을 잘 수도 있다. 5일장에 가는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김장 준비한다고 5일장과 마트를 들락거리며 지출을 많이 했는데 김장 끝내고도 5일장에 갈 일이 생겼다. 3일 정도는 김장김치로 밥상을 채웠지만 이후로는 다른 반찬이 필요했다. 남편도 나도 좋아하는 열기라는 말린 생선을 사고 싶었다. 장마다 꼴뚜기가 나오는 게 아니듯 열기라는 말린 생선도 아무 때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장에 가서 생선 좌판을 둘러봐야 한다.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눈보라가 치던 날, 5일장에 갔는데 생선 좌판이 늘어선 길 반대쪽에 역시 그 아저씨(이제는 할아버지)가 푸성귀를 펼쳐놓고 있었다. 배추 대여섯 포기, 무 몇 단 그리고 대파 서너 단이 보였다. 20여 년 전에 알게 된 농부인데 어느 날 장에서 푸성귀를 팔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살림이 심하게 곤궁해 보이지 않았는데 하고 고개를 갸웃했었다. 할머니들이 말린 호박이나 무청시래기 몇 묶음 또는 늦고추를 장에 갖고 나와 파는 모습은 익숙한데 나이 많은 남자의 같은 모습은 의외였고 낯설었다. 입을 삐죽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까짓 것 팔면 몇 푼이나 된다고 주변에 나눠주기 싫고 아까워서 굳이 장으로 끌고 와서 팔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심 사나운 사람이었던 모양이라고.

그분은 십수 년째 5일장마다 그 자리에 푸성귀를 펼쳐놓고 앉아 계셨다. 뒤늦은 자각이 왔다. 내가 지은 농산물 시세가 낮아도 전전긍긍하며 포전매매에 의존하고 있을 때 그분은 알뜰하고 실속 있게 소매를 하셨던 것이다. 노동의 대가에 스스로 가격을 정해서 파는, 그야말로 농산물 제값 받기의 일환이었다.

농부인 나는 어떤 피해의식이 있다. 농사짓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말 중에, 농산물은 거저 얻는 것이고 싼 가격이 당연하다 여기는 경우를 볼 때는 속에서 불이 난다. 기상 여건 때문에 물량이 적어서 가격이 좀 오른다 싶으면 금배추니 금파니 하면서 호들갑 떠는 밉상에게는 들고 있는 무엇이라도 휘두르고 싶어진다. 한 숟갈쯤 되는 영양크림 가격이 나락 몇 가마니와 맞먹는데 비싸다는 한마디 보태지 않고 잘도 사등만. 농촌의 여자들이 100포기 200포기 김치를 담아서 도시로 사방으로 보내는 중노동을 미풍양속 정도로 가볍게 받는 얌체들 또한 울화덩어리로 보인다. 농부들은 또 쌀농사 지었다고 방아 찧어 택배비 들여가며 천지사방으로 보낸다. 월급 받는 사람들이 보너스 받아서 가욋돈을 만지게 됐더라도 농촌에 인심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다.

어쩌면 농민들의 이런 나눔과 보살핌이 ‘농산물은 거저 얻는 것이고 싼 가격이 당연하다’는 다수의 인식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 농사꾼들은 자급자족하며 물물교환하는 시대를 사는 게 아니다. 농사꾼이 하는 대부분의 노동이 경제활동임을 잊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농사꾼인 나부터 지탄받을 짓을 했다. 비바람이 치든 눈보라가 치든 배추 몇 포기 대파 몇 단을 제값 받으려는 몸부림에 주제넘는 속단을 했으니 말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