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파독 간호사·광부②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서독으로…

  • 입력 2022.12.18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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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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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독일정부의 정책변경으로 간호인력 파견이 중단된 1976년까지, 한국의 간호사 1만1,057명이 독일로 이주한 것으로 집계돼 있다.

그러나 간호(조무)사들이 언제 처음 독일에 파견되었으며, 연도별로 그 인원은 어느 규모였는지를 정확하게 짚어 내기란 쉽지 않다. 한독(韓獨) 양국이 공적인 협정을 바탕으로 간호 인력의 집단취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1969년 8월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독일 마인츠 대학의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한국의 간호사 128명이 독일 땅을 밟았던 1966년 1월 31일을 그 출발점으로 본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1950년대 후반부터도 우리나라의 간호사들이 적은 인원이나마 여러 차례 독일로 건너갔다. 종교기관을 통하기도 하고, 독일인 의사나 외국어학원 관계자 등이 개별적으로 신문광고를 통해 희망자를 모집해서 데려가기도 했다.

2002년 3월에 대한적십자사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왕년의 파독간호사들 중, 하영순 씨(1944년생)가 바로 그런 개별모집 케이스로 독일로 건너간 경우다.

1966년 3월, 서울시립 남부병원.

-얘, 하영순, 여기 좀 봐. 오늘 신문에 서독에 취업할 간호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났거든.

-어디 나도 좀 보자. I.L.I 어학원에서 보사부의 하락을 받아 파독 간호원을 모집한다….

“친구들이 신문을 들고 와서는 같이 지원을 해보자고 해요.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해서 지원서를 써냈지요. 간호사의 서독취업을 주선한 이는 독일어 강사였던 귄터 슘버(Gunter Schumber)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그냥 ‘귄터 박사’라고 불렀어요. 한 달쯤 기다리고 있으니까 여권이 나왔다는 통보가 오대요. 그래서 팔자에도 없던 서독행 비행기를 탄 거지요.”

그 해 4월 22일, 김포공항 출국장은 독일행 여장을 꾸리고 나온 64명의 간호사들과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가족들이 뒤엉켜서 한바탕 울음바다가 됐다. 서독 가서 돈 많이 벌어올 테니 건강히 잘 있으라, 몸조심하고 편지 꼭 보내라…대개 그런 인사들을 울음범벅으로 주고받았다. 그들 중엔 22살의 간호사 하영순도 있었다.

특별한 경우의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국제선 비행기를 타볼 엄두를 낼 수가 없던 시절, 더구나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구라파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다는 사실은, 떠나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들을 전송하는 가족들에게도 서럽고 두려운 사건이었다. 더구나 부모들로서는, 대부분 20대 초반의 어린 딸들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먼 이역으로 내보내야 했으니….

“3년 계약을 하고 떠나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전송 나온 가족들은 영 못 올 데를 가는 것처럼 눈물바람들을 했어요. 하긴 뭐, 나도 3년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이번에 36년 만에야 고국 땅을 다시 밟았으니…식구들한테 할 말이 없지요. 그런데 참, 애당초 공항에 나갔던 간호사는 64명이었거든요. 그런데 63명만 비행기에 탔어요. 왜 그랬냐면….”

간호사 한 명은 왜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을까? 하영순 씨로부터 들어보자.

“공항에 온 남자 친구가 애인의 출국을 저지하려고 출발 직전에 여권을 찢어버린 거예요.”

당시 우리나라는 유럽까지 논스톱으로 날아갈 여객기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프로펠러 전세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그런데 타고 보니 객실에는 스튜어디스는커녕 안내해 주는 사람도 없이 달랑 63명의 간호사들만이 탑승을 했었다는 것이 하영순 씨의 회고다.

“당시 인도의 카라치 공항을 경유한 다음에 또 기약 없이 날아가는데, 밥을 안 주니까 배가 고파 죽겠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가방들을 뒤져서 반찬으로 가져온 김을 매운 고추장에 찍어 먹었더니 빈속이 활활 타고…. 나중에 뒤셀도르프에 도착해서야 왜 밥을 안 줬는지를 알았어요. 프로펠러 비행기라 워낙 요동이 심해서 집단으로 멀미를 할까봐 그랬다더라고요.”

하지만 그들이 나날이 감내해야 할 더욱 혹독한 멀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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