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돌봄아 돌아라!

  • 입력 2022.12.18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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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아이가 있으니 어때?” 1년에 한 번 만날 때마다 친구는 매번 궁금해 했다. “네가 아이를 기르다니, 아이가 아이를 기르는 것 같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첫째 아이를 스승 삼아 부단히 노력했고, 어느새 10년 차 엄마가 되었다. 이제는 터울 진 셋째를 기르며 할머니 마음까지 살짝 느끼게 되었지만, 가끔 만나는 친구에게는 20대 철부지 내 모습이 더 또렷할 터였다. 물론 여전히 육아는 만만한 것이 못 된다. ‘아이들과 있으면 제정신을 못 차리지.’ 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아이가 재밌다며 ‘엄마도감’이라는 그림책을 보여줬다. 아이 입장에서 엄마 표정이 괴물처럼도 그려져 있고, 천사처럼도 그려져 있었다. 뜨끔하면서도 공감했다. ‘엄마가 화났다’, ‘고함쟁이 엄마’, ‘엄마는 왜 화만 낼까’ 도서관에 가면 쉽게 보이는 책 제목이다. 엄마들은 왜 이렇게 감정 조절이 어려울까. 나 역시 전보다 더 많은 화를 내고 더 많이 웃고 있었다.

애초에 임신과 출산부터 무모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기후위기 시대에 인간의 불완전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제적 안정을 누리기 어려운 농촌에서 세 명의 아이를 건사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해야 할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에게는 둘째의 귀여움에 홀려서 셋째를 낳았다고 했다. 셋째는 출산 과정이 수월했다. (분명 죽을 만큼 아팠는데, 수월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일까) 확실히 내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아이가 생기고 모든 것이 변했다. 셋째까지 생기니 확실히 우선순위가 아이들이 되었고, 육아에 맞추어 시간, 공간, 관계의 구성이 바뀌었다. 이제는 나의 건강도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챙기고 있다고 할 정도로.

“아기가 아파서 못 갈 것 같아요.” 어쩌다 있는 모임, 행사에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발목이 잡힌다. 특히 아픈 아이는 엄마를 찾는다. 칭얼대는 아이를 보면 마음이 내려앉는다. 대신 아플 수가 없다. 으레 아이들은 아프면서 크고, 아픈 아이를 보살피는 엄마도 성장한다. 얼마 전 주말에 세 살짜리 막내가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두드러기가 났다. ‘간지러워’하며, 박박 긁기 시작했다. 연고를 바르자 다행히 가라앉는 듯했지만, 다리에서 상체로 올라갔다. 주말 밤인데 몸을 비틀며 간지러워하니, 착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응급실에 가야 하나, 언니 오빠와 같이 먹은 과자가 문제인지, 어제 먹을 때 괜찮았던 굴미역국이 문제인지, 손톱만큼 먹은 반건조 오징어가 문제인지 시간을 되돌려 가며 후회했다.

그 전에 첫째는 태권도 연습하다가 옆에 서 있던 친구 발차기에 맞아 새끼손가락 성장판이 골절되어 4주간 오른팔 깁스 중이었다. 둘째도 감기에 걸려 코가 막힌다고 보챘다. 다 지나가는 과정이지만, 밤잠을 설쳤다. 나는 도대체 책임지지 못 할 일들을 책임지고 있구나 싶었다. 그만큼 나에게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는 말일 것이다.

나에게 기대어 의지하는 생명체들 덕에 내가 상대적으로 어른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10년 동안 아이들 덕에 이만큼 농사를 지속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는 엄마를 자기 뿌리라고 하겠지만, 오히려 엄마에겐 아이가 뿌리란 걸 알까? 따뜻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들이 엄마에게 준 온기를 잊을 수 없다. 인생이란 돌봄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어쩌다 보니 엄마 농민이 되어 집과 밭을 오가며 두루 돌보는 노동을 한다. 희생이란 말은 거창하다.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돌봄을 수행한다. 작물을 암만 잘 돌보아도 하늘의 기운과 맞아야 하고, 육아도 마찬가지다.

바보 같은 질문인지 모르지만, 다시 태어나도 아이를 낳겠냐고 물어본다면 낳을 것이다. 삶이 충분히 안정되어 있어서 아이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엄마라는 삶에 세 번이나 도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든든한 시부모님과 배우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인들이 손때 묻은 장난감과 먼저 입힌 옷 등을 모아 보내주었고, 육아 경험을 나눠주며 내 마음을 살펴준 덕분이었다. 마을에 미더운 어린이집과 아이들이 즐겁게 다니는 작은 초등학교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돌봄이 돌고 돌았다. 엄마도 돌봄을 받았다. 점점 돌봄의 원이 넓어졌다. 준비된 엄마는 아니었지만, 돌봄의 순환이 있어 삶의 존엄함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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