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정지의 힘

  • 입력 2022.12.11 18:00
  • 기자명 이희수(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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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경북 봉화)
이희수(경북 봉화)

그리스 신화에서 곡식과 수확과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에겐 ‘페르세포네’라는 딸이 있었는데, 어느날 지하 세계를 관장하는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다. 데메테르는 밤낮없이 딸을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결국 거처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곡물을 자라게 하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자 모든 대지는 불모지가 되었다. 대지를 황폐화시키며 딸의 귀환을 요구하는 데메테르와 지하세계의 법칙을 구실로 페르세포네를 내줄 수 없다는 하데스 사이에서 고민하던 제우스는 절충안으로 페르세포네를 어머니 데메테르의 나라와 하데스의 나라 사이를 왕래하며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 있는 동안 땅에는 곡식이 자라지 않는 겨울이 찾아오고, 페르세포네가 어머니에게 돌아오면 다시 봄이 시작된다.

뒤늦게 찾아온 추위에 길었던 올해 가을이 끝이 났다. 땅이 얼어붙고 나서야 농부의 한 해 농사가 잠시 멈춘 것이다. 물론 들일이 끝났다고 농사가 완료된 건 아니다. 들일만큼이나 힘든 농산물의 판매가 숙제처럼 남아있지만, 길었던 농번기를 밀어내며 찾아온 겨울은 수확기의 고된 노동으로 지친 농부에겐 반가운 손님과 같다. 겨울 동안 농산물을 팔고 벌어들일 수입이 농사 과정의 비용을 충당하고 남길 흑자나 적자의 규모를 가늠하는 우울한 셈법은 잠시 잊어야겠다. 답답한 장화를 벗고, 농번기 내내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약간의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겨울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 계절의 추위와 궁핍이 얼마나 가혹할지 알 수 없지만, 납치범의 오명을 감내하면서 농부에게 꿀맛 같은 휴식을 선사해준 하데스신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하데스의 납치가 없었다면 불모의 겨울도 없었을 것이고, 농부의 휴식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불모의 계절에도 쉴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만성적인 과로·과적·과속의 위험에 노출된 화물노동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안전운임제 확대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농민의 한 사람으로서 화물연대의 파업을 바라보는 심정이 착잡하다. 도매시장에서 형성되는 농산물의 가격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많기에, 요즘은 많은 농민들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택배사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농산물을 직접 판매한다. 나의 경우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택배로 판매한다. 그러다 보니 물류를 담당하는 화물노동자의 파업으로, 혹여 배송에 문제가 생기거나 택배비가 대폭 인상되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농민의 입장에서 행여 지난번 같은 물류대란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누구에게나 각자의 노동에 상응하는 적절한 경제적 보상과 휴식은 절실한 것이다. 화물노동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최근 <시사인>의 특별기획 ‘화물차를 쉬게 하라’라는 기사를 보면, 화물차 기사 1,43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4.5%가 하루 운전시간이 12시간 이상이라고 답했다. 14시간 이상과 16시간 이상도 각각 27.2%와 9%나 된다. 하루 평균 운행거리는 응답자의31.4%가 600㎞ 이상, 8.7%가 800㎞ 이상이라고 답했다. 휴식과 휴일도 매우 부족하여 22.3%만이 주 2일 휴무를 누린다. 62.2%는 주 1회 휴무, 하루도 쉬지 않는다고 응답한 이들도 7.5%에 이른다.

우리가 입고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한 일상의 많은 것들이 밤낮으로 운송을 멈추지 않은 화물차 기사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시인 백무산은 그의 시 <정지의 힘>에서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리’며,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고 했다. 또한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리’고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고 하였다. 부디 이 ‘정지의 힘’으로 우리 사회가 진일보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데메테르의 파업에 ‘불법파업’이란 딱지나 ‘업무개시명령’이란 강경대응 대신에 절충안으로 길을 찾은 제우스의 지혜를 정부에 촉구한다. 그리하여 물류가 안정을 찾고, 농산물도 안전하게 소비자에게 닿기를 고대한다.

* 이 칼럼은 화물연대 파업이 진행 중이던 12월 7일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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