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그 엄마에 그 딸

  • 입력 2022.12.04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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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저는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나오는 말과 행동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엄마와 같을 때마다 흠칫 흠칫 놀라곤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듣던 ‘딸은 엄마 닮는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손님이 끊이지 않던 집에서 어린 제 눈에 엄마는 늘 부엌에 계셨습니다. 심지어 그 손님이 엄마를 찾아온 손님이더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외식은 꿈도 꾸지 못했던 넉넉하지 않던 살림이었지만 엄마는 손님이 오면 언제나 밥상을 차리고 다과상을 내오셨습니다. 먼 길 찾아온 손님이 계실 적엔 이부자리 준비에 밤사이 목이 마르실까 드실 물까지 차려내셨습니다.

아빠는 늘 “그만하고 당신도 이리와서 앉아”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뻔히 동석 못 할 처지라는 걸 아시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더욱 그러셨던 걸 이제는 알 듯합니다.

어릴 적엔 엄마가 적당히 하고 앉아서 같이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에 동참했으면 하는 마음에 ‘뭘 그리 열심히 하시는지, 적당히 하고 앉으시지, 그냥 있는대로 먹지’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새긴 말이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였습니다.

난 손님이 오면 손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엄마처럼 먼 길 찾아온 손님 앉혀놓고 주방에서 일하느라 손님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건 오히려 손님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청년농업인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함께 장을 보고 함께 먹을 것을 준비해서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먹은 것을 정리하고 추가로 음식을 해내느라 자리에 앉지 못하고 종종거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제게 말했습니다. “그만 하고 와서 앉아.” 아~ 이렇게 점점 더 엄마를 닮아 가는구나….

고향으로 내려와 사회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를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저와 함께 술도 한 잔 기울이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좋은 공기에 기분좋게 쉬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들에게 좋은 것을 정성껏 대접하고 싶고, 머무실 주변이 정갈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분들과 마주 앉는 시간보다 주방으로, 방으로 부산스럽게 다니는 엄마를 닮은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마을 어머니들이 일이 눈에 보이면 고달프다고 하셨는데, 어쩌죠?

가끔 자신들이 희생하셨던 삶을 회상하시면서 ‘일해라, 노력해라, 희생해라’ 하시던 어머님들께 ‘자식들 고생 안 시키려고 공부시키고 애지중지 키워놓고, 왜 엄마들처럼 고생하라고 하냐’며 대들었었는데 자발적으로 일을 만들고 고생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됩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우리 엄마의 딸입니다.

엄마는 쉬는 걸 잘 모르십니다. 특히나 혼자 쉬는 건 정말 잘 못 하는 분입니다. 쉬어도, 놀아도, 먹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해서 쉬고, 놀고, 먹어야 합니다.

어린 마음엔 그게 너무 답답하고 짜증도 났었는데 이제 와 헤아려보니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쉬어볼 생각을 못 하셨던 것 같습니다. 요즘 저는 엄마와 함께 사우나에 가고, 함께 영화를 보고, 함께 여행을 다닙니다. 엄마가 저를 위해 희생하면서 쉬고 놀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혹시나 제가 딸을 키우게 되면 제 딸이 저를 위해 잘 놀아 주었으면 합니다.

얼마 전 어떤 도에서 여성농업인 바우처카드 예산을 삭감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언젠가 여성농민회 언니들에게 들었던 말이, 자신을 위해서는 쓸 줄 모르는 여성농민들이 영화도 보고, 사우나도 가고, 여행도 갈 수 있도록 문화와 여가생활에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지원사업이라고 들었습니다. 일 년에 20만원이라도, 여성농민들이 반드시 써야만 하는 압박감으로라도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농민이 된 딸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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