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정책의 정체, 정책의 주체

  • 입력 2022.12.04 18:00
  • 기자명 최요왕(경기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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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왕(경기 양평)
최요왕(경기 양평)

보통 일년 열두달 중 열한달이 끝나가는 이때쯤 한해 농사에 대한 결산을 어림으로 해보게 된다.

2022년도 꽤나 힘들었다. 봄가뭄에 양파 농사는 겨우 반타작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여름 시작과 동시에 시작된 비는 침수와 일조 불량으로 과채 작물이 주력인 하우스 농사를 자근자근 밟아놨다. 아주 애간장이 끊어지게 하드만.

가을에는 또 가물었다. 가을가뭄이야 봄가뭄보다 견딜만 하지만 제때에 적당한 비가 와서 좀 편해볼까 하는 욕심은 그냥 욕심에 불과했다.

농사란 게 날씨에 크게 좌지우지 되는 거라 익숙해질만 한데도 기후변화란 게 진짜 생긴 건지 예측이 어려워지고 대응하기가 만만찮아지는 걸 절감하는 중이다. 뭐 그렇다고 날씨에 대고 원망을 하고 싶지는 않다. 원망으로 해결되지 않을 일 원망해서 뭘 하겠는가.

그와 반대로 아쉬움과 그를 넘어 원망이 아예 자리를 잡고 있는 대상이 있다. 농업정책이다. 아니 ‘정책 없음’인가. 애초에 사람의 힘으로 조절 불가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면서 이뤄지는 농업이라 큰 틀의 작전이 타분야보다 중요할 텐데 한국의 농업에는 정책이 없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다. 엉성한 정책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 생각하는 건가? 

오륙년 전이던가. 우리나라 농업을 지배하던 아젠다가 6차산업이었던 적이 있다. 1차 농산물 가치가 물가인상률을 못 따라가는 세월이 누적되면서 농가소득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자 가공과 체험 등으로 그 부족분을 메꾸라는 아주 기만적인 정책이었다. 그 바람에 휩쓸려 가공과 체험에 시설 투자를 했던 농가들이 그 시설을 아직도 영양가 있게 활용하면서 소득도 충분히 올리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최소한 우리 지역에서 그런 사례는 보지 못했다.

몇 년 전부터 6차는 쏙 들어가고 그 자리를 스마트팜이 차지한다. 기왕에 양액재배를 기반으로 하는 일부 시설채소, 혹은 잘 봐줘야 R&D 분야에서나 현실적 적용성이 있는 내용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 전체 농업을 구원할 듯 내세우고 예산을 투입한다. 특수한 내용인데 일반화도 될 것 같은 착시를 의도하는 듯한 작태는 6차와 닮았다.

이 건 역시 상당한 시설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라 여기에 뛰어든 농민들은 또 돈깨나 까먹게 된다. 투자분 회수? 어느 세월에? 농민들 입장에서 어떤 길이 농사로 안정적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나 고민하고 있을 때 얼마 안되는 자기 자본을 몇 년 주기로 털어먹도록 꼬시는 짓만 하고 있다. 보조금을 미끼로.

그럴 때마다 드는 의문. 우리 나라 농업정책은 뭐지? 아니다. 깨달음이다. 정책이란 게 없구나. 몇 년 주기로 내놓는 아젠다만으로 나라 전체의 농업 꾸려나가기를 땜빵하려는 건 제대로 된 정책이 없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감추려다 보니 그리 되는 거구나.

말하자면 정책이란 나무 같은 거 아닐까 싶다. 우선은 튼튼한 뿌리가 땅속에서 받쳐 주고 그 위로 중심이 되는 기둥 같은 줄기가 우뚝 서고 거기에 굵은 가지들이 크게 여러 가닥, 그 가지에서 뻗어 나온 많은 잔가지들, 잔가지에 매달린 숱한 잎과 꽃과 열매.

바람이 불면 잔가지는 많이 흔들리고 굵은 가지는 약간만 흔들린다. 중심 줄기는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뿌리가 땅속에서 튼튼히 버텨주기 때문이다. 나무 상태를 봐서 잔가지 치기는 융통성 있게 해줄 수 있다. 상태가 심각하다면 큰 가지도 몇 개 자를 수 있다.

이파리들은 가을이 되면 낙엽으로 떨어지지만 괜찮다. 봄이 되면 새싹이 트고 화려하게 또 우거질 테니. 꽃이 피었다 지는 것도 괜찮다. 꽃이 져야 우리들이 맛있게 따먹을 열매를 맺잖겠나. 

그 나무가 잘 안 보인다. 농사 경력이 20년 정도밖에 안돼서인가 싶은데 아니다. 수십년 경력이 있어야만 느껴지는 정책이 어디 정책다운 정책이겠는가. 예를 들어 농사 경력이 없어도 귀농에 뜻이 있어 몇 가지 정보만 찾아봐도 느낌적 느낌으로 다가오는 게 정책이지.

답답한 마음에 그렇다면 그 정책을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가 고민을 하게 된다. 관료들인가? 정치계인가? 학자들? 농민들? 이 중 어느 한 집단만의 몫은 아닐 게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 있지 않겠는가. 그랬을 때 농민으로서 ‘농민’의 고민을 하게 된다. 농민들이 나무 하나 제대로 그려서, 치장된 줄기 몇 개를 나무라 내세우는 집단들에게 내놓고 ‘나무는 이래야 되지 않느냐’ 설득하는 역할 말이다. 뿌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중심 줄기는 잘 안보이는데 잔가지 몇 개 새로 올려 치장한다고 부실한 나무가 살아나겠는가 지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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