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성숙한 사회는 관계의 힘이 세다

  • 입력 2022.11.27 18:00
  • 기자명 박진숙(전남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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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숙(전남 곡성)
박진숙(전남 곡성)

지난해 11월 여성농어업인육성법 일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농어촌지역 양성평등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에 여성농업인단체들은 여성농업인의 날을 제정하고 여성농업인 행동지침을 선언한 바 있다. 그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지침은 과감하게 귀농을 단행하여 여성농민이 된 나에게 격한 공감의 지침이 되었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1. 여성농업인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성장 중심적 사회발전을 멈추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지구 생명체들의 공생과 행복, 지속가능한 삶을 우선순위에 두는 가치관으로 전환해 나갈 것이다.

2. 여성농업인은 성별, 나이, 인종, 국적 등 모든 형태의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농업·농촌을 만들기 위해 앞장설 것이다.


얼마 전 마을의 경계성장애인이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간 막막했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피해자 구제에 나섰다가 당할지 모를 가해자의 협박이 두렵기도 하였고, 미혼인 피해자에게 씌워질 주홍글씨가 우려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평안한 마을에 분란이 생길 것이라는 걱정도 컸다.

이장님과 의논 후 마을의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에 사실을 알리고 함께 해결책을 강구했다. 성폭력 사건이라면 방송매체를 통해 접한 게 전부인 우리는 증거가 있어야 하느니, 피해사실이 미미하니 크니 하는 의견들로 설왕설래하다가 전문기관을 통해 자문을 구하기로 하였다.

다행히 본인의 피해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대응하고자 하는 피해자와 함께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을 거쳐 인권지원상담소까지 연계하여 절차를 밟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이 커지는 것이 두려워 소심했던 피해자도 피해자 보호조치에 적극적인 이장과 동네사람들의 응원에 움츠러들던 어깨를 펴고 차근차근 대처를 하게 되었다. 피해자에게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고 있는 우리동네 여성농민들은 열악한 피해자 보호시스템에 안타까워하며 마을 내 촘촘한 안전망을 짜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비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제주도의 성평등 마을규약 표준조항에는 마을 내 인권문제(가정폭력, 아동학대, 노인학대, 성폭력 등) 발생 시 주민회원 누구나 적극적으로 피해자 보호조치를 시행할 것을 주민의 의무사항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조항은 모든 농촌지역 마을단위 규약에도 적용하여 각자도생이 아닌 공동체적 대응으로 진행되길 바라 본다.

농촌에서 여성 인권에 대한 침해는 주로 여성에 대한 성폭력, 성희롱, 사생활 침해 등 성적 침해의 형태로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청년 여성농업인이 피해를 입는 경우는 점점 증가추세라 한다.

이 와중에 내놓은 정부조직 개편안에 따른 여가부 폐지 정책으로 그나마 열악한 농촌지역 성평등 정책마저 아예 실종될까 걱정이다. 그러면 부족한 성폭력 지원기관마저 존폐의 위기에 처할 것이고 농촌지역의 성불평등은 심화될 것이다.

그러니 농촌지역의 구조적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성가족부를 존치하고 성폭력 지원기관을 확충해야 한다. 또한 농촌주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접할 수 있는 농촌형 성평등교육을 강화하고 이를 위한 강사양성도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다. 앞으로 사회의 성숙도를 진단하는 기준은 더불어 사는 능력이 될 것이라고들 한다. 약자들이 고립되지 않는 국가제도와 건강한 마을공동체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서 관계의 힘이 작동하는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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