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156] 소박한 평화

  • 입력 2022.10.30 18:00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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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지금 우리 세대는 3종 위기 즉, 전쟁과 세계적 경제 위기, 에너지·식량 위기, 그리고 기후·환경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지 못하고 인간과 인간이 또한 평화롭지 못하다.

그러나 나의 작은 과수원에는 계절의 소박한 평화가 가득하다. 아침·저녁으로 벌써 찬 공기가 서늘한 초겨울로 접어들었다. 후지 사과 몇 개가 아직 매달려 있을 뿐 시나노골드, 홍옥 등은 그마저 휑하다. 마지막 나뭇잎들이 힘겹게 가지에 붙어 있으나 이제 찬바람이 불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을 것이다.

한 해 동안 수고했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작은 과수원의 작은 농부는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지하수 수중펌프의 인버터가 얼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초창기에는 인버터에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어김없이 인버터가 또 작동되지 않아 기사를 부르곤 했다. 이때 농촌 지역일수록 기사들의 수리비와 부속품 가격은 도시보다 비싸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매년 부담이었는데 지난해부터는 인버터의 하얀 초크를 빼놓았다가 봄에 다시 끼우면 겨울에 얼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 후로는 매년 초크를 빼놓는 일이 겨울맞이 첫 번째 할 일이 됐다.

다음으로는 지상으로 나와 있는 수도꼭지의 물을 지하로 내려보내는 작업인데 수도꼭지 맨 윗부분을 돌려 꽉 닫으면 된다. 그다음엔 땅 위로 나와 있는 모든 호스의 물을 빼내 겨울에 호수가 얼어 터지지 않게 빼주었다.

그뿐만 아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사용했던 예초기도 분해해 닦아 주고 녹 방지액도 발라 주었다. 전정가위, 톱, 호미, 낫, 삽, 괭이 등 농기구들도 잘 닦아 비 맞지 않도록 창고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리고 작은 과수원에서 매우 중요한 동력 분무기도 중요 부위가 녹슬지 않도록 녹을 제거하고 구리스(윤활유)도 발라줬다.

또 겨울에 얼거나 성분이 변할 수 있는 석회보르도액, 고삼액기스, 아미노산 등의 액비와 예초기·소형분무기 등의 배터리를 농막 안으로 들여 놓았다. 12월 초에 뿌려 줄 퇴비와 유박 등도 미리 챙겨 놓았다. 이렇게 하면 겨울맞이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난다.

사실 이러한 겨울맞이 준비는 5년 차였던 재작년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그냥 방치해 놓았더니 봄만 되면 녹슬고 고장 나 수리하고 고치느라 고생했다. 이젠 겨울맞이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올 한 해도 나름 친환경 농사를 지었다는 자부심만으로 세 달 정도의 휴식기에 들어간다. 생산이 좀 됐다면 판매하느라 11월 말경에나 겨울준비를 마칠 수 있었을 텐데 금년에는 이쯤 해서 끝내야 할 것 같다.

자연과 환경과 생태계와 계절이 주는 질서와 순리에 몸을 맡기고 겨울맞이 준비를 하는 작은 과수원에는 소박한 평화가 있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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