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가을날, 하동 악양뜰

  • 입력 2022.10.16 18:00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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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바라본 악양뜰 풍경. 본격적으로 추수가 시작된 지난 10일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녘은 말 그대로 황금빛으로 넘실거렸다. 사진 왼쪽 상단에 악양뜰의 상징 같은 존재, 부부송이 보인다.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바라본 악양뜰 풍경. 본격적으로 추수가 시작된 지난 10일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녘은 말 그대로 황금빛으로 넘실거렸다. 사진 왼쪽 상단에 악양뜰의 상징 같은 존재, 부부송이 보인다.
추수를 앞둔 한 농민이 콤바인 진입로의 벼를 낫으로 베고 있다.
추수를 앞둔 한 농민이 콤바인 진입로의 벼를 낫으로 베고 있다.
한 농민이 콤바인으로 수확한 친환경 벼를 트럭 적재함에 쏟아내고 있다.
한 농민이 콤바인으로 수확한 친환경 벼를 트럭 적재함에 쏟아내고 있다.
이홍곤(57)씨가 악양뜰 농로에서 엊그제 수확한 벼를 햇볕에 말리고 있다.
이홍곤(57)씨가 악양뜰 농로에서 엊그제 수확한 벼를 햇볕에 말리고 있다.
논을 메워 만든 감밭에서 농민들이 대봉감을 수확해 손질하고 있다.
논을 메워 만든 감밭에서 농민들이 대봉감을 수확해 손질하고 있다.
마 농사를 짓는 정유근(65)씨가 내년 봄에 심을 종자용 마를 캐고 있다.
마 농사를 짓는 정유근(65)씨가 내년 봄에 심을 종자용 마를 캐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말 그대로 황금빛으로 넘실대는 들녘이다. 가을 햇살을 머금은, 추수를 앞둔 악양뜰(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풍경이 꼭 그렇다. 네모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논들이 제각각 채도를 달리하며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살피니 그 고즈넉한 풍경이 한눈에 잡힌다.

더러는 때아닌 가을비와 세찬 바람에 벼가 누운 논들도 있다. 당연지사 이삭이 무거워진 벼가 먼저 눕는다. 추수를 앞두고 논을 살피러 온 농민은 콤바인 진입로의 벼를 낫으로 살뜰히 베 논둑에 올려놓는다. 서산으로 지는 해에 들녘에 선 농민의 실루엣은 더욱 진하게 그림자가 진다.

인근의 친환경 논에선 한 농민이 콤바인으로 나락을 한창 베고 있다. 일손을 도우러 온 농민들은 논둑에 베 놓은 벼를 한 아름 어깨에 짊어지고 와 콤바인에 부려 넣는다. 콤바인은 논을 한 바퀴 두 바퀴 직사각형을 그리며 추수를 한다. 알곡이 가득 찬 콤바인이 트럭 적재함에 나락을 쏟아내자 싸라기, 지푸라기 등이 섬진강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사방으로 흩날린다.

이날 추수에 나선 농민은 지역 쌀값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10일 현재)에서 정해질 쌀값보다 4,000원을 더 주겠다고 제시한 친환경 영농법인에 쌀을 보낼 예정이다. 다만, 웃돈을 준들 일반 벼보다 수확량이 떨어져 농가소득에선 별반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올해는 영농에 필요한 모든 비용이 상승해 ‘기껏 손에 쥐어봐야…’라고 셈할 정도다. 그래서일까. 추수에 나선 농민들의 구릿빛 얼굴엔 복잡미묘한 감정이 묻어나는 듯하다. 마냥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악양뜰엔 군데군데 대봉감밭이 놓여 있다. 논을 메워 만든 밭이다. 심은 지 십수 년 된 감나무엔 정말 주렁주렁 감이 매달려 있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나무줄기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자연이 주는 빛의 경이로움일까, 대봉감의 주황빛 빛깔이 참 곱다.

감밭에선 한 무리의 농민들이 제각각 바구니를 들고 감나무 사이를 오간다. 아직 감을 따기엔 이르지만 상인의 요청에 잘 익은 대봉감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도 풍년이라 열매도 많이 열리고 수확량도 솔찮다. 올해 감 농사가 잘됐다며 홍시로 변해가는 대봉감을 맛보라고 건네는 농민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악양뜰의 상징 같은 존재, 사이좋게 서 있는 부부송 인근 밭에선 농민들이 종자로 쓸 마를 캐느라 일손이 바쁘다. 쟁기를 단 트랙터로 밭 두둑을 한 번 솎아준 뒤 손 한 뼘 크기의 마를 캐낸다. 흙을 살살 흩어주니 마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토양의 색과 마의 색이 비슷하다. 안동에서 마 농사를 짓다가 하동으로 내려온 농민은 마의 시배지가 바로 옆 동네인 진주라고 알려준다. 올봄에 심어 가을에 수확한 마는 내년 봄 농사의 원천이다. 하여, 그 갈무리하는 손길이 더욱 조심스럽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악양뜰에 기대어 한 생을 살아낸다. 한 해 부칠 소작을 얻고 잃느냐에 따라 보릿고개를 수월하게 넘길지 아닐지를 가늠하고 소작을 하면서도 평생 내 논 한 마지기를 갖기 위해 진력을 쏟는다.

더불어 농사철인 봄·가을엔 ‘농자천하지대본’을 새긴 농기 아래서 품앗이에 나선 온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를 내거나 추수를 한다. 박경리 작가는 <토지> 서문에서 악양뜰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악양뜰은 소설 속에서도 그리고 현재의 삶 속에서도 하동 농민들이 기대어 한 생을 살아내는 중요한 원천이다. 10월의 어느 멋진(그리고 날씨가 참 변화무쌍했던) 가을날, 악양뜰의 황금들녘이, 묵묵히 일하는 농민들이 새삼 소중하고 허투루 보이지 않는 이유다. 악양뜰을 지키고 일궈온(또 지켜갈) 그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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