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시집살이⑥ 친정집도 도피처가 돼주지 않았다

  • 입력 2022.09.25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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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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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임신을 하잖아요. 그러면 졸음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요. 비가 오는 날이면 더하지요. 방안에서 바느질을 하며 졸다가 손가락을 찔려서 피가 나도, 눈꺼풀이 천 근 만 근 내려앉는 걸 어떡해요. 그래서 밖에서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조용하면 잠깐 드러누워 눈을 붙였다가도, 시어머니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후다닥 일어나지요. 들키면 지청구 들으니까.”

이북에서 피란 나왔다가 강원도 홍천의 산간마을로 시집을 갔던 엄금희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다. ‘졸음이 호랑이보다 무섭더라’는 그의 회고담 역시, 그 시절 다른 며느리들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북녘 출신의 이 할머니는, 신혼시절부터 고분고분 순종하지만은 않았노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엄금희는 함경도에서도 대단히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야말로 손에 물 묻힐 일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살림살이에는 그야말로 까막눈이었다. 함께 피란 나온 고모네 집 식구들과 생활을 하다가 아는 사람의 중매로 어느 산간마을로 덜컥 시집을 가버렸다는데, 보릿고개 시기의 어느 봄날에 마당에서 고부간에 나누었다는 대화 내용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오마니, 요거이 뭡네까? 쌀도 아니고 보리도 아니고 참, 요상하게 생겼습네다.

-아이고, 부잣집에서 살다가 산골 오지로 시집을 왔으니 이런 곡식을 봤을 턱이 있나. 가을걷이 했던 식량은 이미 떨어졌고, 보리 수확은 아직 멀었고… 그러니 덜 익은 보리래도 훑어다 볶아서, 디딜방아에 찧어가지고 밥을 지어 먹어야지.

-그러면 이걸 소쿠리에 담아갖고 디딜방아 있는 집으로 가서 찧어야 한다, 이 말씀입메?

-그래. 자, 어디 머리에 여봐라. 으이차! 어이구, 넘어질라. 안 되겠구나. 내가 이고 가마.

어쨌든 이 새내기 주부는 그 설익은 보리를 찧으러 디딜방아가 있는 집으로 따라갔겠다.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발에다 힘을 줘서 세게 밟아야 방앗공이가 올라가지!

-아이고, 오마니….

당시 그 새색시는 임신 초기여서 입덧이 심한데다 먹을거리가 도통 입에 맞지 않아 굶다시피 했기 때문에, 디딜방아 발판을 딛는 발이 후들후들 떨리더라고 했다.

-오마니, 잠시만요. 내레 벤소에 좀 다녀오갔습네다.

그런데 변소에 간다는 핑계로 방아 찧기를 작파하고서 집으로 간 그 함경도 출신 색시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긴 다음에 지체 없이 친정인 고모네 집으로 가버렸다. 그 시절엔 시집살이가 힘들다고 보따리를 챙겨가지고 나오는 경우, 친정 역시 따뜻한 의지처가 돼주지는 못했다.

-이노무 가시나이, 한 번 시집을 갔으면 죽더라도 그 집 귀신이 돼야지, 못 살겠다고 쪼르르 달려와 버리면 어케 하자는 거이야?

-고모, 나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갔시오. 힘들어서 도저히 못 살겠습네다.

-뱃속에 아까지 둔 가시나이가 시집에 안 들어가면 어케 살라고?

물론 다시는 시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얘기는, 힘겨운 시집살이를 토로하다보니 그저 나온 말이었다. 당시의 사회 환경에서 출가를 한 여성이 시집을 뛰쳐나와서, 아비 없는 자식을 홀로 낳아 부양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면 어김없이 신랑이 쭈뼛거리며 아내의 친정에 나타나게 돼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이 찾아와서는, 힘든 일 안 시키고 상전처럼 모시겠다며 함께 갈 것을 간청하였고, 새색시 엄금희는 일단 못 이기는 척 시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안 살림이라는 것이 뻔한 것인데, 갓 시집온 며느리가 어찌 힘든 일 마다하고 빈둥거리며 지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함경도 출신 며느리가 여느 새색시들과 달랐던 점은, 시집살이에 대한 ‘파업’을 그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수틀리면 수시로 단행했다는 사실이다.

“남편이 간청해서 시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남은 번이나 보따리를 쌌어요. 나중에는 아예 애까지 데리고서. 그러다 보니 또 가출할까봐 슬슬 내 눈치를 보더라고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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