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을 맛보다⑰]옥천 오일장 가는 날에 비가 내렸다

  • 입력 2022.08.28 19:20
  • 수정 2022.08.29 09:00
  • 기자명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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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서울엔 폭우 소식이 있었고, 지리산은 여전히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가물어 밭작물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떤 날 옥천의 오일장엘 갔다. 지리산처럼 옥천에도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가지고 올라가는 길에 비를 몰고 내려오고 있다는 작가님의 전화를 받았다. 옥천장에 도착할 무렵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비에 ‘오늘 일정은 망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옥천 오일장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담한 기분이 들게 했다. 비는 줄기차게 내리는데 여기저기 비를 피해 가며 들고나온 농산물을 앞에 놓고 앉아계신 상인들을 만나자 그만 눈물이 났다. 여기저기 띄엄띄엄 앉아계신 자리 앞에는 주로 고구마순, 열무와 얼갈이배추, 그리고 올갱이가 있었다. 비 맞은 고구마순은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곧 물러지고 녹아버릴 텐데 하는 걱정이 되어 고구마순을 모두 사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최대한 사기로 결정하고 구입하니 신발가게, 그릇가게, 철물점 주인아저씨들이 나서서 시장 한 바퀴 도는 동안 껍질을 벗겨주겠다 하신다. 까주신다는 얘기에 마음이 동해 거기 있는 고구마순을 모두 샀다. 엄밀히 말하면 고구마 줄기인데, 김치를 담가 익으면 열무김치와 그 맛을 겨룰 만큼 맛있다. 게다가 폭 익혀 이런저런 생선들과 함께 지지면 시래기보다 오히려 낫다. 그래서 개인이 사기에는 좀 과하다 싶게 많이 구입했다.

 

옥천 오일장에서 우비를 입은 한 상인이 고구마순을 비롯한 농산물을 펼쳐 놓고 비를 피하고 있다.
옥천 오일장에서 우비를 입은 한 상인이 고구마순을 비롯한 농산물을 펼쳐 놓고 비를 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다. 걸으면서 만나는 거의 모든 분들이 다 고구마순 등을 들고나오셔서 앉아 계셨다. 사고 또 사고, 그리고 또 살 수는 없고 난감한 마음만 가지고 천천히 움직인다. 호박순과 가지를 들고나오신 할아버지, 토종오이를 들고나오신 할머니, 올갱이를 들고나오신 할머니가 옹기종기 모여 계신 곳에서 발길을 멈춘다.

일하고 있는 공간 앞에도 있고 마을에 얼마든지 있지만, 호박순도 좀 사고 토종오이도 사고 올갱이도 샀다. 그런데 사면서 보니 모두 한 분이 판매하시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여쭈니 같은 마을 분들이신데 비 와서 할 일도 없고 하여 같이 나오셔서 도와주고 계신다는 말씀이었다. 너무 재미나고 마음이 따뜻해져서 비를 맞고 다니는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짐이 많아져서 차에 가져다 두고 다시 평소에 장이 서는 길을 따라 돈다. 그러다 비로소 다다른다. 내가 옥천장을 고집하고 오는 이유 중의 하나인 닭을 파는 상인들이 거기 있었다. 일반닭, 토종닭, 폐계뿐만 아니라 닭을 부위별로도 팔고 내장들도 고루 팔고 계시는 분들이다. 폐계 한 마리와 내장을 조금 샀다.

 

옥천장에는 종류와 부위를 망라해 닭을 파는 상인들이 있다.
옥천장에는 종류와 부위를 망라해 닭을 파는 상인들이 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따라 걷는다. 커다란 시장 건물이 있는 바로 옆에 한가하니 골목을 따라 걷는 길이다. 대문 앞 평상에 몇몇 가지 농산물을 펴놓고 계신 분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토마토, 호박잎, 햇녹두, 아로니아 등을 놓고 계시는 부부도 만났다. 토마토와 햇녹두를 좀 사고 다시 코너를 돌아 천변을 따라 장이 서는 곳으로 움직인다.

천변에서 대파를 파시는 분을 만나 대파를 샀다. 왜 사람들의 통행이 없는 곳에 앉아계시냐며, 큰 도로변에 나가시면 좀 더 빨리 팔고 가실 수 있을 텐데 그리로 가시라 하니 그럴 수 없다신다. 모두 자기 자리가 있어 남의 자리에 눈독 들이면 안 되며 자리값도 있다고 하신다. 얼마냐고 물으니 웃기만 하시더니 1, 2년 후에는 힘들어서 이 자리에서 장사하는 걸 접을 거라신다.

그래서 동행했던 친구와 함께 우리한테 파시라고 했다. 얼마면 되냐고 재차 여쭈니 큰 소리로 웃으며 그냥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는 농사를 지어 농산물을 들고 와 팔 사람으로는 안 보이니 음식 같은 걸 팔려면 자리가 안 좋다고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 감사한 일이었다. 물질 만능의 건조한 세상에서 만난 단비 같은 분이었다. 잘 까놓은 고구마순을 찾아 옥천장을 떠났다.

돌아와 오일장에서 사온 재료들로 저녁을 해결했다. 메밀순나물, 고구마순김치, 닭내장탕, 폐계무침, 올갱이국 등을 만들어 가볍게 술도 한 잔하니 아침에 떠나기 전 올려놓고 간 된장국 냄비가 화재를 일으킬 뻔했던 일쯤은 다 잊을 수 있었다.

 

상인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고 있다.
상인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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