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작은 채종밭에 서서

  • 입력 2022.07.17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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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20대 중반 이런저런 사회생활 끝에 택한 농사를 천직으로 여긴 나와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 약초 일을 해왔던 배우자가 만났기에, 필자의 농장 이름은 ‘농부와약초꾼’이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 위주로 알음알음 팔곤 하니 내 이름 석 자로 충분했지만, 인터넷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농산물을 판매하게 되고, 약초 농사를 지속하며 나름의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 생겼기에 이러한 신념과 철학을 먼저 공감받는 단계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다.

농사와 채취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업, 농부와 약초꾼의 핏줄을 이어서 살자고 이름을 정하고 나니 우리의 삶은 단순해지고, 정체성이 더 명확해졌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과 밭에는 철마다 열매와 잎, 줄기, 나무껍질까지 오롯이 주는 자연에 기대어 살기 넉넉했지만, 그러한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마을의 땅과 산은 빠른 속도로 개발되어 더 많은 나무가 베어지고, 사람 손이 타다 보니 이제는 예전과 같은 삶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채취에서 농사로 그리고 가공까지 서서히 그 비중을 바꾸어 경제적으로 위험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때로는 경제성을 갖추는 것이 정체성을 흔들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택배 양이 많지 않아 분리수거함에서 나름의 깨끗한 폐박스를 주워 택배로 보내다가 이제는 농장 이름을 택배 상자에 인쇄하여 포장하는 등 비용을 발생시키고, 어쩌면 또 다른 쓰레기가 될 자원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굴레 안으로 들어섰다. 농민이지만 제 먹을 것을 해결하지 못해 근처 가게와 시장에서 사다 먹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다수의 사람이 좋아하거나 잘 팔 수 있는 서너 종류의 작물만을 대량 재배하고, 집에서 먹을 식재료는 작게 따로 기르거나 때로는 미처 심지 못하여 쉽게 사다 먹게 된 것이다.

농민일뿐더러 아이들을 먹이는 엄마로서 부끄러움도 들었다. 자립적 삶을 위해 농사를 짓자고 처음 마음을 내었던 나와 지금의 내가 비교되었다. 이제는 생계를 위한 농사와 밥상에 올릴 농사가 저울질 되고, 노동력의 한계를 받아들여 때로는 집에서 먹을거리 중 일부는 손을 놓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놓친 것의 의미를 되찾은 것은 토종씨앗 수집 활동을 통해서였다. 비록 어떤 씨앗의 값은 금보다 비싸다지만, 농민이 씨앗을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귀히 여기는 시대가 아님에도, 내가 포기한 노동을 씨앗을 대물림해오신 할머니들은 끝까지 쥐고 계셨다.

‘엄마, 이 맛을 다른 데서 못 찾겠어’, ‘엄마, 이게 더 맛있어’. 자식의 말 한마디에 해마다 그 씨앗을 다시 받아 심으셨다는, 씨앗 할머니의 살림과 돌봄의 온도가 나를 돌아보게 했다. 식량을 지켜온 종자주권은 자식에게 맛있는 것을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시골 할머니의 작은 텃밭과 밥상에서 명맥을 이어 왔으니 말이다.

지난 3년간 거창 토종씨앗 모임에서 수집해온 토종씨앗 295점을 지켜온 농민의 성비를 보면 여성이 87%, 남성이 2%, 부부가 11%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총 123명 농부의 평균 연령은 약 81세로 최연소 농부는 52세, 최고령 농부는 94세셨다. 50대는 2명, 60대는 7명, 70대 44명, 80대 62명, 90대 8명으로 70~90대가 93%로 고령화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토종씨앗 수집은 소중한 씨앗을 모아내는 한편 씨앗을 잃어가고 있음을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할머니들은 작년, 재작년까지는 씨앗을 심었는데, 이제는 힘들어 놓았다고 하셨다. 씨앗을 마지막에 놓게 되는 이유로는 체력의 부침과 경제적 원인이 많았다. 수천 년 농부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씨앗을 대물림 해오신 할머니들이 점점 길을 멈추고 계셨다. 조금이라도 먼저 찾으러 나섰다면 만났을 씨앗인데 하며 아쉬웠던 순간들, 그렇게 놓친 씨앗에 대한 절실함 때문에 수집한 씨앗에 대한 책임감도 그만큼 무거웠다.

그러한 마음에서 비롯된 50평 남짓의 작은 토종씨앗 유기 채종밭이 2년 차에 접어들었다. 아직은 7가지 품종만을 재배하고 있는 수준임에도 이를 꾸려갈 시간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또 다른 생태적 경제로의 전환을 위해 소득을 따지지 않고 작은 채종밭을 일구는 것이다. 더불어 나 역시 수십 년 전에 이 땅에 작은 씨앗이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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