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기는 꺾는 게 아니고 흐르게 하는 거에요

  • 입력 2022.07.03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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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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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기싸움’이라고 말한다.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라고들 한다. 전학생을 맞이하는 기존 학생들이, 학년이 바뀌면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부모님이 어린 자녀를 양육할 때 등등, 초반에 기를 잘 잡아야 한다고들 한다. 새로운 상대에게 그동안 지켜온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빼앗기지 않도록 이겨야 하거나, 관계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확인받고 싶을 때 ‘기부터 꺾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우량아였고, 운동으로 다져진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으로 인해 누군가를 기선제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난 한때 화도 못 내고, 억울하면 눈물부터 나오던 울보였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목숨 걸 일이 아니면 이기려고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고, 나 역시 그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통해 감정표현을 잘 하는 법을 배운 후부터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다행히 아직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굳이 ‘기’를 쎄게 발산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이제 두 달. 나의 기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랑의 지인들 중 나하고도 결혼 전부터 친분이 있는 동생이 얼마 전 신랑에게 “형, 지금 형수 기를 꺾어놔야 돼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이가 없어하는 나에게 신랑은 자긴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농촌에서 남녀가 결혼하면 남편의 기반을 따라가야 한다는 인식이 대부분인데, 각자 농장에서 떨어져 사는 우리를 보고 아마 대놓고는 말하지 않아도 뒷말들이 있겠구나 싶었다. 남자가 너무 착해 빠져서 마누라 못 데리고 온다고, 여자 못 잡고 산다는 말들이 오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90년대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음메~ 기죽어, 음메~ 기살어”라고 하던 생각이 났다. 그 시절에는 엄마들은 기를 죽이고 사는 것이 미덕이었고, 일자 눈썹에 억척스러운 순악질 여사 정도는 되어야 기를 펴고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여성들이 기를 펴고 남자들과 평등하게 소통하게 된 세상이 이뤄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을까 싶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기를 살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함께 살기보다 내 의지를 잘 따르도록 ‘초반에 여자 기를 꺾어놔야 한다’는 말이 2022년 청년의 입에서 나오다니 너무 서글프고 속상하다.

그런 마음에 친한 언니한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더니, 그 언니도 자기 얘기를 해주었다. 농약을 안치고 농사를 짓는데 밭이 풀 잡는 시기를 그만 놓쳐서 풀밭이 되어버렸다. 온 동네 사람들이 볼 때마다 제초제를 치라고 성화를 해도, 그 언니는 굳이 새벽부터 나가 이 더위에 풀을 뽑고 있다고 한다. 농약을 치는 순간 밭에 정이 떨어질 것 같아 차마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면전에서는 고생한다, 대단하다 하지만 막상 뒤돌아서서는 ‘저래서 시집을 못갔지, 남자 말을 들어먹지 않으니 어느 놈이 오겠어. 고집이랑 기가 세서 다 이겨먹으려고 한다’ 등등의 말을 하는 것을 건너 듣고 있다고 한다. 물론 너무 고생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커서 하시는 말이겠지만 여성의 ‘기’를 그렇게 풀 잡듯이 잡아 꺾어야 평화가 오는 걸까? 무릇 ‘기’는 자연스레 흐를 때 가장 좋은 것이 아닌가?

비단 여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어른과 아이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 신입과 기성 사이 모두 그렇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토론하고, 존중할 때 관계는 원만해지고 ‘기’는 충만해질 것이다. 꺾지 말고 채워주고 세워주자. 서로의 기를 잘 통하여 흐르게 해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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