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여성농민의 해방일지

  • 입력 2022.06.19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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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애들, 남편, 차 모두 던져놓고 모이자!’ 지난달 말 거창 토종씨앗 모임 뒤풀이 날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 10여 년간 뒤풀이 저녁 모임에 참석한 적이 한두어 번 있을까. 막내가 어리고 읍에 가려면 재를 넘어야 하는 리 단위에 사는 뚜벅이 형편이라 나만 참석을 못 해온 줄 알았는데, 코로나에 언니들도 바빠 가벼운 행사 뒤풀이를 제외하고는 첫 정식 뒤풀이 자리였다. 3년간 수집의 결과를 묶어 거창 씨앗도감을 출간하고, 그 와중에 워크숍과 장터, 토종 밥상, 모내기, 교육 등 각종 행사를 치르며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싶었다.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고, 마침 첫 신입회원도 오신 터라 더욱 구색이 맞았다.

그러나 주 양육자인 내가 저녁에 읍에 나가려면 마음만으로는 어림없다. 처리해야 할 밀린 일이 없고,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배우자가 아이를 케어할 수 있을지, 집에 돌아올 때 이동 여건이 가능한지 등 살필 것이 많다 보니 그냥 어제처럼 오늘도 집에 있는 것이 모두에게 편한 일이 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뒤풀이에 오기만 하면 ‘기사(단장님의 배우자)를 섭외’하여 시골 마을 곳곳까지 데려다준다는 토종살림 단장님의 시원한 배려에 감동하여 집을 나서자고 마음을 먹었다.

읍으로 나가는 버스의 막차 시간은 6시 40분이다. 미리 아이들 저녁을 준비하여 먹이고, 배우자가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엄마~, 엄마’에 반응하다가 버스 시간을 곧잘 놓치기도 하는데, 오늘은 막차이니 더욱 시간에 쫓긴다. 버스를 타야 자유다. 뜻밖의 해방감을 느끼는 마음을 보니 평소 집과 가족에 매인 삶을 반증한다.

그렇게 구성원 9명이 모두 모였다. 서로의 근황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가족 안부와 자녀의 진로까지, 심했던 가뭄 상황, 직거래 장터, CPTPP 반대 행사 준비, 토종씨앗 모임, 토종 학교 관련 내용까지 종횡무진 이야기가 쏟아졌다. ‘깔깔깔’ 우리의 웃음소리에 접시는 와장창 깨지고도 남았다. 그만큼의 강한 기운을 주고받는다.

모임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는 ‘근근이’였다. 농사로 근근이 살고, 토종씨앗 활동도 근근이 하고 있었다. ‘내년에는 못할 것 같아’, ‘다음에는 못 나갈 것 같은데…’ 하면서도 이런 활동이 씨앗이 되어 지역에서 작은 변화가 꿈틀하는 반응에 힘을 얻어 한 번 더 해나가는 것이다. “근근이가 중요해!” 우리는 모두 끄덕였다. 꾸준한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살아 있으니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끝까지 해보는 것, 가늘지만 단단한 마음이 모여 활동이 꾸려지고 있었다. 근근이 지속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11시가 넘어 막내가 자다 깨어 엄마를 찾는다는 전화를 받고 아쉬움을 남기며 자리를 파했다. 섭외한 기사님이 계셨지만, 술 아닌 음료만 마신 언니가 데려다주겠노라 나섰다. 밤길 운전을 해준 언니, 시골 밤길 운전은 무섭다는 언니 옆에 있자고 동승한 언니들, 그렇게 면 단위 사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간 4명의 언니 덕에 조용한 밤거리가 무섭지 않았다. 왜 이 밤공기를 자유롭게 마시지 못했던가. 아이를 낳고 농촌에 살며 귀가 시간이 가장 늦은 하루였다. 다행히 아이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한편으로 뒤풀이 자리에서도 다 내려놓지 못하는 나를 보았다. 아이들은 잘 자고 있을까? 그런 걱정을 기본적으로 달고 있다. 내가 나의 해방을 훼손한다. 이진아의 책 <곱게 지지 않기로 해>에서는 ‘어쩌면 여자들의 진짜 적은 별 저항 없이 살던 대로 살고 싶은, 수백 년 동안 체화된 관성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최선을 다한 삶이 자신의 억압을 강화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제는 적응을 멈출 때가 되었다.

해방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만,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 한동안 화제의 드라마였던 ‘나의 해방일지’처럼 온전한 해방은 어디에도 없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근근이 살아가는 여성농민들이 어둑한 밤에 의지하며 허심탄회하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제와 다른 내일의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해방에 기여하는 관계란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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