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수컷 고양이의 비애

  • 입력 2022.06.12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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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겨울 가뭄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온갖 작물들이 타고 있다. 식물은 뿌리로 물을 흡수하면서 영양분도 같이 먹는데 물을 먹지 못하면 굶어죽는 셈이다. 뿌려 놓은 참깨는 흙이 충분히 덮어진 부분은 싹이 나오고 더러는 겨우 싹을 틔웠다가 말라죽고 또 많은 참깨는 싹조차 틔우지 못했다. 참깨는 먼지만 덮어줘도 싹이 올라온다고 했는데 날씨가 무난할 때나 가능한 모양이다.

수확량이 부실한 보리타작을 마치자마자 볍씨를 파종해 놓고 남편은 트랙터를 끌고 논으로 달리고 나는 대파밭의 풀을 매면서 모종 관리를 한다. 대파밭의 풀을 매면서 요즘처럼 슬렁슬렁 하기는 처음이다. 풀을 뽑아 놓고 돌아서면 다른 풀이 곧바로 나오는데 가뭄으로 풀도 맥을 추지 못했다. 수분 증발을 억제할 수 있도록 잎에 막을 형성한 채 발아되는 쇠비름은 여전히 기세등등하지만 바라귀나 방동사니는 호미가 필요 없이 한손으로 뽑아도 맥없이 뽑힌다.

해가 져서 집에 들어오니 두 마리 개와 고양이들이 마중을 한다. 수고양이 한 마리가 오른쪽 뒷다리를 절뚝거린다. 내게 먹을 것을 요구하면서도 만지는 것은 단연코 거부하는 놈이다. 외부에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사료에 캔 참치를 섞어주니 잘 먹는다. 식욕이 있는 것으로 봐서 치명적인 부상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수고양이는 암고양이에 비해 몸집이 큰 편인데 다친 수고양이는 암고양이와 다르지 않은 체구다.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는커녕 지키기에도 벅차게 태어났다. 들고양이 수놈 서너 마리는 그들이 정해 놓은 영역인 우리 집 수고양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생후 3개월쯤부터 공격을 해서 기어이 쫓아내곤 했다. 낮에 들에서 일하는 나는 보호막이 되어 주지 못한다. 몸집이 작게 태어난 수고양이는 날마다 목숨을 걸고 뛰어오르고 가슴 졸이며 숨어야 한다.

수컷으로 태어난 고양이의 운명 비슷하게 사람도 남성이라서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이미 얹어진 경우가 많다. 남성이 결혼할 배우자에게 원하는 조건은 예쁘고 착하면 된다는 2~3가지 정도라고 한다. 반면에 여성이 배우자에게 원하는 조건은 경제력 좋고 자상하고 성실하며 게다가 힘도 세고 부지런해야 하며 기념일을 잊지 않아야 하고 등등 요구 조건이 수십 가지, 그러니까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남성이 해결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존 그레이).

결혼한 남성은 한 집안의 경제를 주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사회적으로나 식구들로부터 요구받는다. 1950~60년대 이전에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돈만 잘 벌어오면 사람 대접 받는다고 길러졌다. 그러나 여성이 경제력을 분담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남성이 가사일과 육아까지 적극적이지 않으면 눈칫밥을 먹게 되었다.

나는 20kg 비료 포대를 겨우 들지만 남편은 40kg 무게도 거뜬히 들어 올렸으면 좋겠다. 다른 남자들처럼 농기계 운용을 잘해서 장판 깔아놓은 듯 그렇게 써레질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3,000평의 한 논에 서해바다와 동해바다 그리고 한라산과 백두산이 공존하지 않게. 그런 논에 모를 심어 놓으면 동해바다처럼 깊은 곳은 물러지고 백두산처럼 높은 자리는 말라죽게 된다.

새벽에 나가서 밤까지 논바닥을 고르다 들어온 남편한테 소리를 질러댔다. 어떻게 30년 동안 초보냐고. 논 고르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은 내가 다 처리하고 있는데 모내기할 논이 엉망진창이라고. 대파밭을 매다가 남편한테 밥을 갖다줘도 몇 숟가락 뜨다 만다. 이래저래 입맛이 없는 모양이다. 수고양이는 다리를 다쳤어도 밥은 잘 먹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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