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물어보세요] Q. 교과서에도 나오는 함평 고구마 사건이 무엇인가요?

  • 입력 2022.06.05 20:27
  • 기자명 김한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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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김한결 기자]

Q. 교과서에도 나오는 함평 고구마 사건이 무엇인가요?

A. 때는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년 2만여톤의 고구마를 생산하고 있던 고구마 주산지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평년보다 5,000톤의 고구마가 더 생산될 예정이었는데요, 때마침 농협이 생산된 고구마를 17.4% 인상된 가격으로 전량 수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농협수매전용 포대를 배포해 농가가 수매준비를 하도록 했죠.

농협의 말을 들은 농민들은 고구마를 팔지 않고 수확한 고구마를 도로변에 야적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농협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쌓아둔 고구마는 날이 추워지면서 그대로 썩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농협은 되레 고구마가 썩은 것이 자신들과 무관하다며 농민들이 관리를 소홀하게 했다는 둥 핑계를 대며 약속을 지키라는 농민들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이때 함평군 가톨릭농민회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꾸려 피해조사를 한 결과 함평군의 총 피해액은 1억4,000여만원에 달했습니다.

가톨릭농민회는 각계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실천과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기도회를 열고 피해보상을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함평 농민의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고구마가 노변에 눈비를 맞고 굴러 밟히는 것이야말로 온 농민이 짓밟히는 것과 같다. 농민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가 보상되고 그들의 정당한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다.”

농민들은 계속해서 단식과 투쟁을 이어 나갔습니다. 두 해가 흐른 1978년 4월 광주 북동성당에 모인 농민들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성당은 고립됐습니다.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고 단식자 중 5명이 쓰러진 후에야 농협은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보상을 하기에 이릅니다. 2년에 가까운 투쟁 끝에 이뤄낸 결과입니다.

그 이후에 농협이 주정회사와 결탁하여 고구마 수매자금 80억원을 유용한 사실이 새롭게 폭로되기도 했습니다만, 오늘로부터 44년 전에 있었던 함평 고구마 사건은 농민들이 자주적으로 권리를 되찾고 피해보상을 받아냈던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결집하는데 초석이 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조각입니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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