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모성에 한계가 있다면

  • 입력 2022.05.22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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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드디어 셋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의 영향인지, 다행히 일주일도 안 되어 어린이집 일과에 적응했다. 그리하여 임신 후 3년간 반쪽짜리 일꾼으로 해왔던 농사와 택배 일을 이제 한숨 돌려 재개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바쁜 일이 생길 때마다 어른들께 아이를 부탁드려야 했던 부담과 죄책감을 털어낼 수 있었다.

둘째까지는 아이 기르며 농사짓고 아등바등 살았다면, 코로나에 노산으로 터울진 셋째부터는 육아만으로 충분히 고단하여 일에 대한 책임은 배우자가 거의 도맡았다. 합을 맞추어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된 배우자는 안팎으로 몸과 마음을 애태웠고, 번아웃(burnout)이 올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가계 소득은 주춤했다.

그럼에도 올 초에 마흔을 앞두고 마지막 아이를 계획할까, 일을 할 것인가 경계에 서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를 돌볼 여건이 관건이 되었지만, 심적으로 셋째를 돌보며 ‘엄마’ 정체성에 보다 몰입하여 첫째와 둘째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아이들끼리 어울려 저들끼리 보듬어가며 커가는 모습에 넷째를 낳고 싶었다. 게다가 아이들을 같이 키운다는 것은 축적된 육아 경험과 노하우가 생생하고, 그 밖에도 육아용품, 옷가지 등을 물려줄 수 있어 아이를 기르기가 수월할뿐더러, 막내가 얼마나 귀여운지 둘째를 낳고도 알았지만 셋째를 낳고는 그 애틋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더 늦기 전에 마지막 아이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유산을 했다. ‘뱃속에 새사람이 왔구나’ 반갑게 맞이하던 시간이 갑자기 상실을 애도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임신을 확인하고 2주 후에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지만, 아기집은 텅 비어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아무리 보려고 해도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하얀 점이 작은 별처럼 반짝반짝하며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상상하며 갔는데, 아기집 안에는 새까맣고 고요했다. 앞이 캄캄해지면서 나도 그 암흑 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배 속에 아기가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아기 심장소리를 들으러 가서, ‘수술’이란 단어를 말하며 나왔다.

이 작은 죽음 앞에 무기력해졌다. 수정란의 유전적 문제 때문에 유산된다고 하지만, 작은 생명의 씨앗을 잘 키워내지 못한 내 몸을 책망했다. 사실 아기집도, 포궁(胞宮)도, 난소도 정상이었다. 컨디션도 괜찮았다. 차라리 아기를 못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엄마가 된다는 기쁨에도 무게가 상당하다는 것을 아니까, 가볍게 보내기로 했다. 슬펐지만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엄마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영혼과 다시 작은 아이를 품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인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일인지 돌아보았다. 여성의 월경, 임신, 출산, 육아라는 ‘삶을 생산하는 존재’로서의 경험을 부정하거나 수탈하는 방식으로 축적되어 온 자본주의 가부장제 구조에서 경제력을 선택하거나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또는 아이의 불투명한 미래를 위하여 임신을 거부하고 비혼을 결정하는 것은 다부진 여성들의 생존 방식으로 대세가 되었다.

반면 나처럼 경제력도, 시간도, 몸도 잃어가는 임신과 육아 과정 앞에서 고민하는 이들은 ‘엄마 됨’을 선택함으로써 삶의 질이 급격히 달라지는 위기를 마중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임신과 육아라는 작고 소중한 생명 앞에서 이성을 잃어버리고 초인적인 감정에 휩싸일 때도 많지만, 결국 현실과 맞닥뜨려 다시금 임신과 육아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는 대개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한편으로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었다. 한 생명이 꽃피울 수 있는 매개자가 되어 이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최고의 일이라는 생각에 늦깎이 모성을 또다시 바랐지만, 정신을 차리자고 도리질 친 마음도 어쩔 수 없었다. 농사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적정 시기를 맞추는 것이 핵심이다. 아이도 그렇다. 자연의 선물이다. 그렇지만 이 시대는 자연을 거스른 지 오래, 불임을 유도하는 사회 착취 구조를 뜯어보아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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